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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복(田永福) 목사는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전도자다. 본명은 오다 나리찌(織田楢次)로, 그는 일본의 가혹한 식민지정책으로 신음하는 한국인들의 참상이 안타까워 죄과를 회개하는 심정으로 온갖 고난을 겪으며 진정한 한국인이 되기 위해 ‘전영복’으로 개명하였고 최후 순간까지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였다.오다는 1908년 1월 18일 일본 오사카지방의 가난한 어촌마을에서 9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재산을 털어 절간을 세울 정도로 신심이 깊은 불교도였다. 오다는 부친의 유언대로 절간에 들어가 유명한 스님이 되려고 수련에 전념했으나 회의를 느껴 17세에 승복을 입은 채 절간을 뛰쳐나왔다.그는 고베 시내를 방황하다가 노방전도대의 뒤를 따라 교회로 들어갔더니 이상하게도 자꾸 눈물이 쏟아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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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03.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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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는 한국 교계의 분열의 시대였다. 성결교회의 합동소식은 당시 교계의 빅뉴스였다. 그때 용산제일장로교회가 큰 분열에 휩싸였다. 용산제일교회는 기독교장로교회 소속교회였는데 분열의 바람 속에 보수파들이 대거 교회를 떠나갔고 남은 자들도 불안해했다. 어느 날 그 교회의 선임 장로가 찾아와서 자기 교회의 분열을 얘기하며 도와달라고 했다.“목사님이 성결교회를 합동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 남은 신자들도 언제 떠날지 모르는 위기입니다. 오셔서 우리 교회를 화합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 뜻은 알겠습니다만, 저는 성결교회 목사입니다. 장로교회에 가서 목회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잘 수습해주시면, 우리 교회가 목사님을 따라 성결교회로 가겠습니다.”이 말에 그는 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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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10.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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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제1회 성결교회재흥총회에서 유세근 목사가 본부 사무국 참사로, 김순모 장로가 본부 재무부참사로 선정되어 성결교회를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교회가 안정되자 김순모는 사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가 다니던 일본생명보험회사의 사장이 귀국하면서 최순영 씨와 김순모 등 몇 사람에게 회사를 인계했다. 그래서 몇 사람이 모여 ‘대한생명보험’을 창업하고, 최순영 씨 부친을 회장으로, 최순영과 그는 이사로 재직하며 열심히 일했다. 그 때 그의 기도가 이루어져 월남한 가족(아내, 아들 2)을 장충단교회에서 만났다.1947년에 유세근 목사가 장충단교회를 떠나자, 그는 마침 북한에서 홀로 내려 온 함흥산수정교회 강송수 목사를 장충단 제2대 교역자로 모셨다. 그러나 1년 후, 동서 박명원 목사가 충무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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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10.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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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나이 32세가 된 김순모는 생명보험 신의주 영업사원으로 있으면서 많은 실적을 올렸다. 그는 신의주동부성결교회의 담임 한성과 목사가 자기처럼 본래 천주교 신자였지만, 만주에 공부하러 가서 17살에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한 목사의 중생과 성결에 대한 설교에 놀라며 철저히 회개했다. 장로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지만 처음 듣는 중생과 설교의 말씀에 은혜 받고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성결교회를 가장 이상적인 교회로 생각하고 감사했다.김순모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주와 선천에까지 진출하여 영업실적을 올려 의주와 선천지부의 지부장을 겸직하는 승진을 했다. 교회를 떠날 수 없는 그는 아내와 아들은 신의주 집에 두고, 의주와 선천을 다니며 활동하며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에 올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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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0.02.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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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모는 거의 한 달 동안 집안 식구들 몰래 예수교회에 다녔다. 천주교와는 달리 예수교회는 친절했고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어 좋았다.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을 잘 믿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렇지만 천주교회에 가지 않은 것이 탄로 나서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매를 맞고 혼쭐났고, 천주교회가 싫어서 이웃 마을의 장로교회에 다녔다고 자백을 했다.“이 놈아, 예수교는 이단이야! 우리 가문이 4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신앙전통을 마음대로 바꾸다니, 이 괘씸한 놈!” 할아버지가 분노하자, 아버지가 그의 종아리를 매로 때렸다. “우리 가문에 어쩌다 저렇게 고집 센 놈이 생겼는고? 천주님을 안 믿으면 망할 터인데.”그 말에 순모가 얼른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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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10.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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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모(金順模)는 1904년 3월 2일에 황해도 재령에서 김택근 씨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키가 작았지만 매우 똑똑했다. 그의 가문은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여서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며 성장했다. 할아버지가 그를 특별히 귀여워했고, 그는 할아버지를 무척 따랐다. 그래서 7살이 될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천자문과 함께 예절을 배웠다. 예절이 없으면 짐승보다 못하다고 가르침을 받고 어른들에게는 인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을 배워서 어른들에게 인사를 잘했다. 그가 7살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그해 여름에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합병하면서 마을 어른들이 가슴을 치며 울었다. 초등학교에는 일본인 선생이 와서 일본 말을 가르쳤다. 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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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0.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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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다 목사는 영남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펼치려 하였으나 매일같이 쏟아지는 폭우로 중단하고 7월 말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전시위문단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일본군을 위해 사역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한국을 순회하면서 “한국에도 성결의 은혜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교자적 각오로 나섰던 것이다. 그는 진정한 성결운동가로 국수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옹졸한 일본인은 아니었다. 그의 한국 전도여행은 기차도 자동차도 인력거도 없는 고난의 길이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장맛비를 흠뻑 맞고 떨어가며 한국의 외진 교회까지 찾아다니다가 달구지와 함께 개천에 굴러 떨어지고, 홍수로 넘치는 강물에 빠져죽을 뻔도 했지만 성결의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그는 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인 1913년 ‘조선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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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0.0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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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다 목사가 북부지방에서 진행한 20여 일 동안의 순회전도는 큰 성황을 이뤘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고 그들은 성경의 지식을 얻고자 매우 갈망하고 있었다. 나카다는 한국인을 불쌍히 생각했다. 한국인들은 의지할 정부도 없고 돈을 벌면 탐관오리들에게 착취당하여 일상의 희망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북부지방 사람들은 몇 차례 전쟁으로 짓밟혀 비참한 경험을 맛보았다.나카다 목사는 북부지방 전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심취하는 것을 보고 두 주일 동안 경기도와 충청도지방의 순회전도를 계획했다. 그는 수원에서 집회를 마치고 전의를 거쳐 공주로 갔다. 공주에 있는 감리교회와 침례교회 두 교회가 연합집회를 가졌다. 이것은 이 지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마침 여기에서 1년에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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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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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다 목사 일행은 통역이 없었기 때문에 부산에서 배에 올라온 한국인들에게 한자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했다. 서울에 도착한 나카다는 여러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를 가졌다. 나카다는 약 500명이 모이는 감리교회에서 영어로 설교하고 선교사가 통역했다. 그들은 한국인 통역을 세우고 말을 타고 서울을 떠나 북쪽의 전선으로 향했다. 12마일에서 14마일마다 일본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는데 나가타 목사 일행은 그들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전도지를 배포하고 옥외집회를 열었다. 또한 밤에는 한국인교회를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했는데 보통 아홉시에 저녁식사를 하고 열시에 집회를 시작하여 12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종종 교회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낮에는 한국어와 일본어로 된 전도지를 가지고 일본군인과 한국인들에게 복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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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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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다 쥬지 목사는 일본에 돌아온 후 영국에서 만났던 박스턴의 아들 박스턴 B. L 선교사를 통해 사사오, 아마다 등의 좋은 동지를 만나 ‘불의 혀’ 잡지를 발간하면서 성결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성령의 세례’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강조하고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호리네스유니온’(성결의 벗)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카우만 부부와 자주 편지로 연락하면서 “일본에서 성결운동을 하는 전도단체와 무디성서학원과 같은 실제적 전도에 필요한 전도자 양성기관을 만들어보자”는 카우만 부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1901년 2월 22일 카우만 부부가 일본에 오게 되었고, 나가타 주지와 카우만 부부는 1901년 4월 1일 도쿄 중심지에 중앙복음전도관을 개관했다. 이곳을 성결복음 전파의 근거로 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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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09.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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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교회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1907년이다. 하지만 한국에 최초로 성결복음이 전해진 것은 1904년 동양선교회 창시자의 한 사람이며 일본인 성결운동가인 나카다 쥬지(中田 重治) 목사를 통해서다. 그는 일본군인들을 위해 만주전선을 찾아 한국을 방문했으며 전도활동을 펼쳤다.나카다 쥬지는 1870년 10월 27일 일본 아오모리 히로사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방 사무라이 출신으로 술을 좋아하다가 쥬지가 5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홀어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굶기도 했고 나쁜 장난도 많이 했다. 그러나 큰 형의 권유로 교회에 따라다니다가 마음을 잡고 17세에 히로사께 감리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다음 전도자가 되기로 결심했다.1887년 도쿄 에이화(英和)학교 신학부에 입학했으나 나까다 쥬지는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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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09.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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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태평양전쟁을 준비 중인 일제는 주한 선교사들을 모두 본국으로 축출했다. 그래서 한국성결교회는 한국인들로 이사회를 조직하고 이명직 목사를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최석모 목사도 계속 이사직을 맡았다. 동양선교회에서 교역자 생활비와 신학교 운영비를 전담했는데 이제 한국인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이사회는 비장한 결심으로 자치와 자급을 선언했다. 당시 교역자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하는 교회는 2백 여 교회 중 아현교회를 비롯해 몇 교회뿐이었다. 최 목사는 아현교회에서 상당한 금액을 총회에 매월 보내어 보조하게 했다.1941년 일제는 미국 진주만을 폭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국민들을 통제했고 식민지 조선도 내핍을 강요하며 군수물자를 강제 헌납하게 했다. 일제는 성결교회 기관지 활천에 재림사상이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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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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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모는 영국 신사처럼 키가 크고 깔끔한 인상을 가졌으며 명 통역과 목회 부흥으로 선교사들에게 크게 인정받았다. 그래서 1923년에 동양선교회가 이사회 협의체로 운영되면서 이명직 목사와 함께 동양선교회 이사가 되었다. 한인으로는 처음이었는데 그는 이사로서 교회 개척과 확장에 힘썼다. 그는 1928년에 당시에 가장 교세가 좋은 아현교회 주임목사로 임명됐다. 그는 아현교회가 당시 성서학원 캠퍼스로 사용되었기에 수요일 저녁예배를 신학생 간증설교 예배로 적극 활용했다. 신학생들에게 설교의 기회를 제공하고, 신자들은 은혜를 받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그는 1929년에 이사회 결의로, 함경남북도, 강원도,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그리고 중국에 세워진 한인교회들을 3개월에 걸쳐 순회하며 이들의 상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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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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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모는 졸업한 후 무교동전도관의 부임 교역자로 임명 받았고, 동시에 성서학원 사감으로 겸임했다. 동양선교회에서는 졸업자에게 첫 임지 발령을 했고 1915년 당시 전도관은 전국에 9개였다. 교회마다 주임교역자와 부임교역자가 있었고, 개척의지가 있는 졸업자는 고향 지역에 개척전도사로 파송하였는데 최석모는 무교동전도관에 부임하게 된 것이다.당시 무교동전도관의 주임교역자는 이명헌 목사였다. 최석모는 주일에는 무교동전도관에 가서 주임 목사의 일을 거들었고, 새로 믿는 신자들에게 기독교의 교리와 사중복음에 대해 가르쳤으며, 오후에는 신자들을 지휘하여 노방전도를 하는데 앞장서는 등 모범을 보였다. 그는 나팔을 직접 불어 사람들을 모으고 전도설교를 했다.그는 평소에는 남자 기숙사의 사감으로, 학생들의 생활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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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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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모가 입학한 경성성서학원은 1911년 무교동전도관에서 개교한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이다. 이는 한국성결교회의 첫 선교사이며 감독인 존 토마스가 동경성서학원을 모델로 세운 학교로, 교수들은 토마스 목사가 원장 겸 교수로, 정빈 전도사와 토마스 목사의 부인이 찬송가를 가르쳤다. 그리고 이장하 전도사가 선교사의 말을 통역했다.제1회로 입학한 학생은 강시영 등 3인(남 2, 여 1)으로, 남녀공학이었다. 이는 당시 남녀를 차별하는 유교사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파격적이었다. 이듬해(1912년)에 최석모 외 8명(남 7, 여 2)이 입학하여 3년 동안 공부했다. 이 때 입학 조건은 나이 25세 이상이고 거듭난 경험이 확실한 사람만 뽑아 학비와 기숙사 생활비를 장학금으로 지급하여 무료로 공부시켰다.최석모가 입학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
2009.1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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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모(崔錫模)는 1890년 서울의 소위 양반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상대대로 전해진 유교사상과 한학(漢學)을 이어받기 위해 6살에 서당에 들어갔는데 영리하고 총명하여 10살에 천자문을, 12살에 명심보감을 떼어 신동(神童)이란 소리를 들었다.그러나 당시는 대한제국이 일제(日帝)에 의해 국권이 급속히 쇠퇴해져 가고, 서양의 새 학문과 문화가 들어오는 개화기였다. 그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민족학교인 사립 보성(普成)학교에 입학했다. 보성학교는 당시 대한제국의 내장원경 이원익 대감이 젊은이들이 새 시대에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1905년에 세운 중등교육학교였다.최석모는 보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국가는 곧 일본의 간악한 음모에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사법권과 외교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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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09.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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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현 목사는 1957년 3월 28일, 교인들의 눈물의 전송을 받으며 광주구동교회에 부임했다. 그는 광주기관장들을 방문하여 교회가 도울 일이 있으면 협력하자고 인사를 다녀 지역유지들과 유대를 다졌으며 농아학교와 맹아학교, 가난한 이웃을 심방하면서 사랑을 베풀었다. 구동교회는 광주시내의 한복판을 흐르는 광주천변에 있는 공원지대인데 동쪽으로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거북이 같이 생긴 구릉(丘陵)지대이기 때문에 그 일대를 구동이라 불렀다. 일제는 전라도를 통치하려면 거북이 등에 해당하는 이곳에 야스쿠니신사를 지어야 한다며 충혼탑과 절간을 지었다. 구동교회 자리는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는 돌출부분인데, 일제는 무등산의 정기를 일본에게 돌려야 한다며 일본 승려 사택으로 목조건물을 지었고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
2009.11.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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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현 목사는 1946년 9월에 수원성결교회에 부임했다. 수원교회는 대각사라는 일본불교의 붉은 벽돌건물사찰이었는데 내부는 한 아름이 넘는 육송기둥을 8개나 세운 복잡한 적산건물이었다. 박 목사는 우선 교인들을 동원하여 내부를 헐어내고 기둥을 목재소에서 제재하여 마루를 깔아 교회다운 건물로 리모델링한 후에 불하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새롭게 일궜으며 성도들을 위해 헌신했다.박 목사는 형무소나 유치장 선교도 했는데 당시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많은 목사들이 출마할 때 박 목사에게도 여러 사람이 찾아와서 출마를 권유했다. 그러나 박 목사는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인데 이제 되돌아 세상에 나갈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평양에서도 기독교연맹 활동을 권유받았으나 하나님 사역에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
2009.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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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현 목사는 1945년 10월 신의주 동부성결교회에 부임하여 이성봉 목사와 북한지역교회 재건을 주도했다. 이 목사는 남쪽 지역을, 박 목사는 북쪽 지역을 순회한 결과 38개의 북한지역 교회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박 목사는 일본헌병대에서 쓰던 진남포교회당을 다시 찾아 성결교회 재건 부흥회를 인도했고 장로교와 감리교 교인들까지 교회당에 가득 모여들었다.해방 이후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주축으로 자리잡고 이들에 협력하는 기독교세력으로 기독교도연맹에 세워졌다. 당시 기독교연맹을 주도하는 인물로 위원장을 맡은 이가 김일성의 외삼촌 감양욱 목사였다. 그는 박 목사에게 수차례 찾아와 자기와 함께 조국을 건설하자며 평안남도기독교연맹위원장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박 목사는 자기는 세상을 출가한 사람이라며 고사했다. 그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
2009.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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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현은 만주 신경에서 부호가 된 형을 찾아가 공부하는 동안 월 20원씩만 아내에게 도움을 달라고 청했다. 예수 믿는 동생을 못 마땅히 여기던 형은 택시회사를 차려줄 테니 여기서 함께 살자고 권했다. 하지만 그는 소명을 저버리지 않고 1937년 경성신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돈이 없어 난감할 때 부인이 그의 손목시계를 팔아 학비와 여비를 마련해주며, 여기는 내가 알아서 잘 있을 테니 걱정 말고 공부하여 목사님이 되라고 격려해줬다.1940년 경성신학교가 대학인가를 받아 조선총독부의 자격시험을 보아 합격하면 정식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당시 경성에는 경성신학교와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 연희전문(연세대)과 보성전문(고려대) 학생들이 사방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는 1941년 대학인가 받은 경성신학교 제1회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
2009.10.17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