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심양교회 사역

박용현은 만주 신경에서 부호가 된 형을 찾아가 공부하는 동안 월 20원씩만 아내에게 도움을 달라고 청했다. 예수 믿는 동생을 못 마땅히 여기던 형은 택시회사를 차려줄 테니 여기서 함께 살자고 권했다. 하지만 그는 소명을 저버리지 않고 1937년 경성신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돈이 없어 난감할 때 부인이 그의 손목시계를 팔아 학비와 여비를 마련해주며, 여기는 내가 알아서 잘 있을 테니 걱정 말고 공부하여 목사님이 되라고 격려해줬다.

1940년 경성신학교가 대학인가를 받아 조선총독부의 자격시험을 보아 합격하면 정식 대학 졸업장을 받게 되었다. 당시 경성에는 경성신학교와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 연희전문(연세대)과 보성전문(고려대) 학생들이 사방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는 1941년 대학인가 받은 경성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만주의 심양교회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심양교회는 조선인이 많이 사는 대성가 2단에 있었다. 당시 만주에 14개의 성결교회가 있었는데 장로회, 감리회 등 5개 교파합동으로 ‘만주기독교회’라는 교단결성이 진행되고 있었다. 1941년 11월에 성결교회는 이사를 파송하여 이를 승인해주고 결성식에 축사를 해주고 박용현 등 5인에게 파송된 이사들이 목사안수를 주었다.

박 목사는 심양교회를 검정벽돌 현대식으로 건축했으며 조선인과 중국인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를 부흥시켰다. 전염병이 창궐하여 의사도 꺼리는 동리를 찾아가 병자를 돌보았다. 당시 성결교회는 부흥성가를, 장로교회는 찬송가를, 감리교회는 찬미가를 사용했는데 만주기독교회는 찬송가를 합동하기로 했다. 박 목사가 성결교회 대표로 참석하여 합동찬송가를 만들었다.

1945년 8·15해방을 맞아 많은 동포들이 만주에서 고국으로 귀환할 때 소련군 사령관과 협의하여 마지막 열차를 교섭하고 귀향조선인총단장이 되어 동포들을 인솔하고 10월초에 봉천역을 출발, 열흘간의 고생 끝에 국경도시 안동에 도착했다.

안동에서 3일을 기다린 후 압록강을 건너 고국의 땅 신의주에 도착했다. 박 목사는 조선이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게 되며 미군은 38도선 남쪽에, 소련군은 38도선 북쪽에 주둔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가 완전 독립할 때까지 수염을 깍지 않았다. 그때가 40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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