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에 목사 되어 제1차 교단 합동운동 주역 역할

1945년 11월, 제1회 성결교회재흥총회에서 유세근 목사가 본부 사무국 참사로, 김순모 장로가 본부 재무부참사로 선정되어 성결교회를 재건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교회가 안정되자 김순모는 사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그가 다니던 일본생명보험회사의 사장이 귀국하면서 최순영 씨와 김순모 등 몇 사람에게 회사를 인계했다. 그래서 몇 사람이 모여 ‘대한생명보험’을 창업하고, 최순영 씨 부친을 회장으로, 최순영과 그는 이사로 재직하며 열심히 일했다. 그 때 그의 기도가 이루어져 월남한 가족(아내, 아들 2)을 장충단교회에서 만났다.

1947년에 유세근 목사가 장충단교회를 떠나자, 그는 마침 북한에서 홀로 내려 온 함흥산수정교회 강송수 목사를 장충단 제2대 교역자로 모셨다. 그러나 1년 후, 동서 박명원 목사가 충무로교회에 시무하면서 와서 도와달라고 하자 그는 충무로교회로 옮겨 충성했다.

차츰 회사가 안정되는 듯 싶더니 1950년 6.25 전쟁으로 김순모는 모든 것을 버리고 경상도 밀양으로 피난을 갔다. 그는 밀양성결교회를 돌보다가 1953년에 아는 사람의 권면으로 전라도 광주로 가서 제일성결교회에 나가며 광주에서 보험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큰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1950년 서울신학교에 강제로 들어가게 했는데, 공부 중 6.25가 일어나 함께 피란생활로 고생하다 신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했다.

“넌, 내 마음에 하나님께 서원해서 바친 아들이다”고 달래고 달랬지만, 아들은 “나는 목회에 소질이 없으니, 안되겠어요. 장로가 되어 충성하렵니다”라고 계속 고집했다. “할 수 없구나, 하나님께 서원했으니, 늙은 몸이라도 목사가 돼야겠다.” 그렇게 결심한 그는 1953년 봄에 보험에 손을 뗀 후, 부산에 있는 피란신학교 전수과에 입학했다. 50세였다.

그 때 마침 제일교회의 신자들 일부가 구동에서 집을 얻어 구동교회를 개척했는데, 신학교에 입학한 김 장로를 전도사로 초빙했다. 신학교가 서울로 복귀하자, 그는 월요일에 밤차를 타고 서울에 가서 4일간 공부하고 금요일 밤차를 타고 내려와 목회했다. 그는 1956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무장로 특혜로 1년 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해에 그는 서울 창신성결교회로 전임했고 헌신적으로 목회하여 40명 성도가 4년 후에는 2백여명으로 부흥됐다. 이 때 많은 학생들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 중 서울대학생 성기호 군이 주의 종으로 헌신했다.

1961년 교단이 NCC문제로 분열되자 그는 존경하는 이명직 목사가 선택한 예성에 가입했다. 1963년 신길동교회로 전임했다가 예성의 총무가 되었다. 그는 이명직 목사를 무조건 따르는 그룹이어서 이명직 목사의 뜻을 따라 기성과의 합동운동에 전력했다. 그는 예성의 대표로 기성의 총회 서기 이봉성 목사와 은밀히 자주 만나 합동문제를 풀어나갔다. 처음에 부딪친 문제는 명분이었다. 이봉성 목사는 군목출신이어서 ‘원대복귀’를 강조했다. “김 목사님. 이제 기성으로 원대복귀하시지요.”, “원대복귀라니? 우리가 무슨 군대조직인가요?”, “예성이 기성에서 나갔으니 원대복귀가 맞지요.”, “우리보고 항복하고 들어오라는 말은 싫어요. 교단 대 교단이니, 합동이라고 합시다.”, “아,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래서 세부사항을 합의한 후, 마침내 1965년 7월 23일 오후 2시 기성은 아현교회, 예성은 신촌교회에서 각각 합동을 위한 해산을 선언하고, 이날 오후 7시 아현교회에서 양측 인사들이 서로 눈물을 흘리며 합동예배를 드렸다. 이 1차 합동으로 예성에서 복귀한 교회는 129교회였다. 어려움을 이기고 일궈낸 그의 화합정신이 빛을 발한 사건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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