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목회자

박용현 목사는 1957년 3월 28일, 교인들의 눈물의 전송을 받으며 광주구동교회에 부임했다. 그는 광주기관장들을 방문하여 교회가 도울 일이 있으면 협력하자고 인사를 다녀 지역유지들과 유대를 다졌으며 농아학교와 맹아학교, 가난한 이웃을 심방하면서 사랑을 베풀었다. 구동교회는 광주시내의 한복판을 흐르는 광주천변에 있는 공원지대인데 동쪽으로 무등산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거북이 같이 생긴 구릉(丘陵)지대이기 때문에 그 일대를 구동이라 불렀다.

일제는 전라도를 통치하려면 거북이 등에 해당하는 이곳에 야스쿠니신사를 지어야 한다며 충혼탑과 절간을 지었다. 구동교회 자리는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는 돌출부분인데, 일제는 무등산의 정기를 일본에게 돌려야 한다며 일본 승려 사택으로 목조건물을 지었고 이곳에 터를 잡았다. 교회 내부는 강단에서부터 출입문 사이에 네모난 기둥이 2m 간격으로 세운 어수선한 광주시 소유의 적산가옥이었다. 박 목사와 성도들은 교회를 신광교회로 개명하고 광주시와 협조하여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교회 개축을 위해 성도들은 벽돌과 시멘트를 나르고 콘크리트를 반죽하여 현대식교회로 건축했다.

1962년에는 전남지역에 가뭄이 극심하여 UN의 식량원조와 세계기독교 구호기관의 구호사업이 있을 때 박 목사는 전라남도 구호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전라남도 각지에 구호품과 식량을 나눠줬다. 급식소를 시내와 지방 각처에 설치하여 우유와 강냉이 죽 등으로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도왔다. 욕심이 없는 박 목사는 자기 가정보다도 교회와 이웃을 위해 노심초사했다. 그는 자녀들의 학교입학이나 졸업식에는 찾아가지 않았지만 교회 청년이 진학하거나 졸업할 때면 학교까지 찾아가 격려하고 축하하면서 기쁨을 나눴다.

신광교회에서 헌신하던 그는 1971년 63세에 그가 1957년까지 시무하던 소정교회로부터 재차 청빙을 받아 부임했다. 이곳에서 헌신적으로 사역하던 그는 1972년 교단총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 목회사역을 수행했고 1978년 70세임에도 지교회인 행정교회를 신축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1979년 71세까지 목회사역을 한 그는 3월 15일 소정교회에서 은퇴하였으며 1981년 12월 4일 노환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 향년 73세로 삶을 마무리했다. 그의 영결예배는 광주신광교회에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으로 드려졌다.

박용현 목사의 목회에는 백복련 사모의 내조가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사모로서 믿음의 자세와 사명감에 늘 초심을 유지하며 평생 목사를 내조한 충성된 주의 종이었다. 사랑으로 이웃을 위해 헌신했고, 춥고 배곯고 어려운 살림을 스스로 감당하고 남편과 6남 1녀의 자녀들을 위해 말없이 기도하며 반듯하게 양육한 위대한 믿음의 현모양처였다.

박용현 목사는 오직 목양일념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였으며 그의 헌신은 오늘날 많은 성결교회 목회자들에게 귀한 사역의 모범으로 기억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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