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일념

박용현 목사는 1946년 9월에 수원성결교회에 부임했다. 수원교회는 대각사라는 일본불교의 붉은 벽돌건물사찰이었는데 내부는 한 아름이 넘는 육송기둥을 8개나 세운 복잡한 적산건물이었다. 박 목사는 우선 교인들을 동원하여 내부를 헐어내고 기둥을 목재소에서 제재하여 마루를 깔아 교회다운 건물로 리모델링한 후에 불하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새롭게 일궜으며 성도들을 위해 헌신했다.

박 목사는 형무소나 유치장 선교도 했는데 당시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많은 목사들이 출마할 때 박 목사에게도 여러 사람이 찾아와서 출마를 권유했다. 그러나 박 목사는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인데 이제 되돌아 세상에 나갈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평양에서도 기독교연맹 활동을 권유받았으나 하나님 사역에 온전히 헌신키로 한 입장에서 거절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박 목사는 부임 4년째인 1950년 6월에 수원교회를 사임하고 25일 주일에 마지막 고별설교를 했다. 하지만  6월 26일 소정리교회로 전출을 하기 위해 수원역으로 나갔다가 6·25한국전쟁으로 인해 되돌아왔다. 다음날인 27일 물밀듯이 내려오는 피난민 틈에 미국인 선교사가 닷지트럭을 몰고 “목사님과 가족을 데리러왔으니 빨리 가자”며 이 전쟁이 쉬 끝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일본에 갔다가 미국으로 가서 전쟁이 끝난 뒤에 와서 교회를 재건해야하는데 목사님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박 목사는 “우리 조국을 버릴 수는 없다. 죽더라도 조국의 품에서 죽을 것이니 당신들이나 늦지 않게 떠나라”며 거절했다. 그들은 하나님의성회 교단의 선교사들이었다.

조금 늦었지만 박 목사 가족은 6월 30일 금요일에 소정교회로 부임했다. 교회당은 멋진 한옥 ‘ㄱ’자 건물로서 꺾인 모서리 가운데에 강단을 꾸미고 여자 쪽은 길고 남자 쪽은 짧았다. 박 목사가 소정교회에 부임하고 보니 정부인과 소실이 함께 집사가 되어 교회의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박 목사는 이는 성경과 교회법에 크게 위배됨을 알리고 소실에게서 집사직분을 박탈했다. 정 부인과 소실에게 똑같이 직분을 준다하여 교회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던 많은 주민들이 이러한 일을 전해들고 한사람씩 교회에 나와 믿기 시작했다. 박 목사는 원리원칙에 분명한 사람이어서 제18회 교단총회에서는 법제부장으로 선출되어 온 교회가 교단의 법을 준수할 수 있게 하는 일을 감당했다.

박 목사는 부임 5개월여 만에 11월 건평 39.1평의 소정교회당을 건축했다. 소정교회가 초대교회부터 일반가옥을 매입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성전건축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린아이부터 장년에 이르는 모든 성도들은 교회당 건축에 헌신적으로 참여하여 견고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했다.

소정교회는 안정되고 믿음과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 소문이 났다. 충북지방회의 개최를 비롯하여 일주일간의 지방교사강습회, 일개월간의 동계지방성경학교와 지방 소속기관들의 모임의 장소로 제공되었고 박 목사의 성경강의는 명 강의로 정평이 났다. 그가 성경을 강의할 때는 지방교사들이 적극 차며해 그의 강의를 경청하며 교회에서 어떻게 어린이를 가르칠 것인지 고민케 했다. 또한 지역유지들도 교회의 일에 모두 협조를 아끼지 아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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