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하 옥고생활과 6.25 전쟁 중 납북
1940년 태평양전쟁을 준비 중인 일제는 주한 선교사들을 모두 본국으로 축출했다. 그래서 한국성결교회는 한국인들로 이사회를 조직하고 이명직 목사를 이사장으로 추대했다. 최석모 목사도 계속 이사직을 맡았다. 동양선교회에서 교역자 생활비와 신학교 운영비를 전담했는데 이제 한국인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이사회는 비장한 결심으로 자치와 자급을 선언했다. 당시 교역자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하는 교회는 2백 여 교회 중 아현교회를 비롯해 몇 교회뿐이었다. 최 목사는 아현교회에서 상당한 금액을 총회에 매월 보내어 보조하게 했다.
1941년 일제는 미국 진주만을 폭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국민들을 통제했고 식민지 조선도 내핍을 강요하며 군수물자를 강제 헌납하게 했다. 일제는 성결교회 기관지 활천에 재림사상이 게재됨을 알고 1942년 11월에 강제로 폐간했고, 이듬해 봄에 경성신학교도 폐교시켰다. 일제는 모든 교파를 일본기독교 산하 통합교회로 만들려고 했으나 이명직 목사의 반대로 저지되자, 1943년 5월에 성결교회 교역자 2백여명을 현지 경찰서에 체포하고 재림사상을 문초했다.
최석모 목사도 서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아 몇 번이나 기절했다. 3개월 만에 공의가 그를 늑막염으로 진단하여 병보석으로 석방됐지만, 집에서 가료 중 옥중의 동료들을 생각하고 콩밥에 간장 하나로 식사했고, 겨울에도 불을 때지 못하는 이층 마루방에서 지내면서 동료들의 석방을 위해 기도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그는 서둘러 아현교회의 문을 열려고 했지만 교회는 해산 때 친일파가 헐값에 사서 사설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신자들과 주택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사람을 만나 계속 인격적으로 대하니, 감동받은 주인은 자기가 산 헐값에 교회에 팔아 교회를 수리하고 재건했다. 그리고 동료 교역자들을 찾아 성결교회 재건을 논의했다.
마침내 그 해 11월 9일. 서울신학교 강당에서 교역자와 장로, 집사 등 3백여 명이 모여 성결교회 재흥총회를 감격스럽게 치뤘다. 이 때 그는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어 교회재건과 개척에 앞장섰다. 미아리, 여주교회 등 다섯 교회가 그때 아현교회가 개척한 교회들이다. 그리고 당시 일본인의 가옥이나 사찰이 적산으로 분류되었는데, 미군정의 허락으로 이를 접수하여 성결교회로 세운 것이 수원교회 등 24교회가 된다. 이는 영어 잘하는 최석모 목사가 미군 당국과 교섭하여 이룬 공로였다. 그는 복교한 서울신학교의 교수로도 겸직해 봉사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남침해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고 한달 만에 경상도 낙동강까지 빼앗겨 한국은 큰 위기에 봉착했다. 대부분의 교역자들이 정부를 따라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지만, 최석모 목사는 서울신학교 교수 다섯 분과 함께 신학교와 신자들을 지키고, 돌본다는 각오로 서울에 남았다.
그해 8월 2일 오전 11시에 서울 각 교회 목사들은 승동장로교회로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이유는 북한 김일성이 종교의 자유를 선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석모, 이건, 박현명, 김유연, 박형규, 유세근 등 성결교회의 지도자 6명이 참석했다가 그들의 농간에 속아 약 2백여명의 목사들이 북으로 납치되어 끌려갔다. 성직자들은 평북의 토굴에서 지내다 모두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격적인 목회자 최석모 목사도 그렇게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