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배우러 OMS 선교사를 찾은 청년

최석모(崔錫模)는 1890년 서울의 소위 양반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상대대로 전해진 유교사상과 한학(漢學)을 이어받기 위해 6살에 서당에 들어갔는데 영리하고 총명하여 10살에 천자문을, 12살에 명심보감을 떼어 신동(神童)이란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당시는 대한제국이 일제(日帝)에 의해 국권이 급속히 쇠퇴해져 가고, 서양의 새 학문과 문화가 들어오는 개화기였다. 그는 부친의 권유에 따라 민족학교인 사립 보성(普成)학교에 입학했다. 보성학교는 당시 대한제국의 내장원경 이원익 대감이 젊은이들이 새 시대에 새로운 학문을 배워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1905년에 세운 중등교육학교였다.

최석모는 보성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국가는 곧 일본의 간악한 음모에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사법권과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다. 그는 애국자인 선생들로부터 새 학문과 함께 애국애족심에 대해 배우며 허물어져 가는 국가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다.

그는 학문 중에도 영어에 관심이 많아 열심히 했고 어학성적이 남보다 뛰어났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5년 만에 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때는 나라가 이미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져 고종황제가 일본의 압박에 물러나고, 순종황제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으며, 많은 일본인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마구 활개치는 상황이었다. 곧 나라가 일본에게 합병된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나돌아 백성들은 절망감에서 힘을 잃었다. 마침내 1910년에 한일합병이 강제로 체결되고 하루아침에 백성들은 절망과 비탄에 빠졌다.

당시 뜻있는 대한의 인재들이 갈 길은 두 가지 뿐이었다. 하나는 일본어를 배워 일본으로 유학을 가거나 일본의 관리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어를 배워 일본보다 더 크고 발달한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선진 새 학문을 배워 실력을 쌓은 후,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다.

최석모는 나라를 빼앗은 일본이 싫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 갈 것을 결심하고 22세 때 서울 종로에 있는 한성영어학원에 들어갔다. 보성학교 시절에 문법을 중심으로 기초 영어를 배웠지만, 이곳에서는 회화를 중점적으로 가르쳐 영어 교사나 미국 유학 희망자를 양성하는 당시 유일한 영어전문 학원이었고 그의 영어실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 가을 날 오후였다. 그는 미국인과 직접으로 영어회화를 하기 위해 동네에 있는 서양선교사의 집을 예고도 없이 불쑥 방문했다. 이것이 OMS(동양선교회)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는 이곳을 여러 번 방문하고 선교사들과 대화를 통해 영어회화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선교사들에게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영어학원 재학 중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승만 박사와 만났다. 이 박사는 최석모 보다 15살이 많았지만 영어학원 강사로 잠시 일할 때 최석모와 친교를 맺었다. 이승만은 당시 YMCA를 중심으로 대한독립에 대해 은밀히 논의하던 중 재차 일경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미국선교사의 주선으로 석방된 이승만은 1912년 최석모가 영어학원을 졸업하자, 그 해 미국에서 개최하는 세계 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자기와 함께 가서 미국서 공부하고 독립운동을 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최석모는 이미 민족의 소망을 기독교의 복음에서 발견하고 미국유학의 꿈을 포기했다. 그리고 OMS선교사들의 권면에 따라 1912년에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고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하러 미국으로 떠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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