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장로교회를 화합시키고, 부평 에덴성결교회 개척

1960년대는 한국 교계의 분열의 시대였다. 성결교회의 합동소식은 당시 교계의 빅뉴스였다. 그때 용산제일장로교회가 큰 분열에 휩싸였다. 용산제일교회는 기독교장로교회 소속교회였는데 분열의 바람 속에 보수파들이 대거 교회를 떠나갔고 남은 자들도 불안해했다. 어느 날 그 교회의 선임 장로가 찾아와서 자기 교회의 분열을 얘기하며 도와달라고 했다.

“목사님이 성결교회를 합동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 남은 신자들도 언제 떠날지 모르는 위기입니다. 오셔서 우리 교회를 화합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그 뜻은 알겠습니다만, 저는 성결교회 목사입니다. 장로교회에 가서 목회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잘 수습해주시면, 우리 교회가 목사님을 따라 성결교회로 가겠습니다.”

이 말에 그는 얼른 두 가지를 생각하고 승낙했다. 하나는, 분열로 상처를 입은 어린양들을 말씀으로 잘 치유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고, 또 하나는 교회가 성결교회로 온다면 성결교회의 부흥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1965년 가을부터 4년 동안 장로교회에 부임하여 열심히 은혜로운 설교와 화합을 위해 힘을 썼다. 화해의 달인답게 그 결과 교회가 화목하게 되자, 교회가 부흥되어 예배인원 80여명에서 300명이 넘도록 부흥되었다.

어느 주일에 그는 성결에 대한 설교를 했다. 신자들이 은혜를 받았다. 그날 오후, 당회 때였다.  “목사님. 성결에 대한 설교는 이제 그만 했으면 합니다.”, “왜요? 성경에 거룩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목사님이 성결교회 목사님이라, 성결을 자꾸 설교하시면 우리 장로교회 신자들이 목사님을 따라갈까 걱정돼서 그렇습니다.”

그 말에 김 목사가 자기를 청빙한 장로를 보며 말했다. “장로님. 교회가 화합되면 나를 따라 성결교회로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다른 장로들이 그 장로에게 화를 내며 막 따졌다. 그 장로가 이런 저런 변명을 하자, 이제 장로들끼리 서로 다투었다. 기가 막혀 김 목사가 선언했다. “교회가 화합되고 부흥됐으니, 내 사명을 다했습니다. 나 때문에 장로님들이 서로 다투면 또 교회가 분열될 것이니 나만 물러가면 됩니다. 제발 하나가 되도록 하세요. 이것이 예수님의 뜻입니다. 나는 이제 성결교회로 돌아갑니다”하고 사표를 내고 나왔다.

임지도 없이 나온 김 목사는 며칠 후, 성결교회 신앙의 동지들을 불러 점심을 대접하면서, “성결교회에 돌아와 죽고 싶소. 어디 개척교회라도 할 만한 곳 있으면 소개하세요.”, “목사님. 연세가 얼마이시지요?”, “금년 65세요. 은퇴할 나이이지만, 마지막으로 성결교회를 개척해서 교단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이 말에 자리를 함께 한 이만신 목사가 감동했다.

당시 이만신 목사가 시무하는 부평신촌교회에 에덴구역 10여명이 있었다. 걸어서 20분 되는 시골산동네였는데, 교회가 멀어서 이만신 목사가 지교회를 꿈꾸고 있었다. 이 일이 성사되어 1969년 5월에 산동네에 부평신촌교회의 지교회로 에덴교회가 개척예배를 드렸고, 김 목사가 개척자가 됐다. 에덴구역 김여제 권사가 사유지 4백평을 교회대지로 헌납했다.

김 목사는 마지막 힘을 다해 전도하여 1년 만에 교회 30평, 사택 20평을 건축했고, 80여 명이 모이다가 1977년 은퇴하기까지 교회의 터전을 닦았다. 그는 1982년 11월에 소천했지만, 에덴교회는 도시계획에 따라 아파트촌이 됐고 5백여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의 아들 명은이도 서울신대 대학원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부친의 소망을 이뤄드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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