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선교회 이사로 감동스런 미국여행

최석모는 영국 신사처럼 키가 크고 깔끔한 인상을 가졌으며 명 통역과 목회 부흥으로 선교사들에게 크게 인정받았다. 그래서 1923년에 동양선교회가 이사회 협의체로 운영되면서 이명직 목사와 함께 동양선교회 이사가 되었다. 한인으로는 처음이었는데 그는 이사로서 교회 개척과 확장에 힘썼다.

그는 1928년에 당시에 가장 교세가 좋은 아현교회 주임목사로 임명됐다. 그는 아현교회가 당시 성서학원 캠퍼스로 사용되었기에 수요일 저녁예배를 신학생 간증설교 예배로 적극 활용했다. 신학생들에게 설교의 기회를 제공하고, 신자들은 은혜를 받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1929년에 이사회 결의로, 함경남북도, 강원도,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그리고 중국에 세워진 한인교회들을 3개월에 걸쳐 순회하며 이들의 상황을 동양선교회에 보고해 당시 성결교회의 선교와 목회정책을 현지 실정에 맞도록 힘썼다.

1933년 5월, 동양선교회는 그를 이사 자격으로 미국에 보냈다. 이는 피선교지 교회의 대표로 한국교회를 후원한 미국 성도들에게 우리 교회의 형편을 알리고, 교회개척의 자금을 확보하려는 계획 속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는 처음 가는 미국여행에 희망이 부풀었지만 부산에서 화물선을 타고 가는 길은 험난했고 멀미로 시달려 13일 동안 밥을 거의 먹지 못해 큰 고통을 받았다.

그렇지만 도착 후 그는 미국 성도들의 환영과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가는 곳마다 큰 감동을 주었다. 당시 미국은 대경제공황의 시기여서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그는 한국교회의 상황을 보고하고 선교사역에 대한 헌신을 당부했고 가난한 노인 성도들이 10불, 20불씩 정성껏 헌금을 해 주었다. 그들은 작은 헌금들이 한국교회 신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쓰인다는 말에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어느 날 로스엔젤스의 카우만, 길보른 선교사의 묘소를 찾았다. 동양과 한국에 사중복음을 전해준 복음의 은인이었다. 생각과 달리 그들의 묘소는 초라했다. 최석모는 묘비에 쓰인 “일본, 조선, 중국선교사. 하나님께서 믿는 자와 동행하신다”는 글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죽은 후에도 남긴 그들의 겸손한 글에 큰 은혜가 되었던 것이다.

최석모는 어느 날 미국성도들이 노방전도를 하는 것을 참관했다. 주로 노인들이 자기들이 애용하는 악기들을 가지고 나와서 불며 전도했다. 그들 중 유난히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구부러진 80대의 할아버지가 하모니카를 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는 길보른 총리의 장인이 아닌가. 학교의 보일러실에서 불을 때는 일을 하면서도 즐겁게 살았고, 복음전도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최석모는 큰 감동을 받았다. 이런 감동적인 글이 ‘미주순회기’로 활천에 실려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최석모 목사는 20년 동안 아현교회에 시무하였고 총회와 교회 목회에 전력을 다했다. 가정이나 자녀들을 돌 볼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심방하다가 가난한 병든 신자들을 보면 의사인 이성구 집사 병원으로 보냈고 평소 최 목사를 존경하는 이 집사는 무료로 치료해 주었다.

또한 신자들의 직장을 알선하고, 만나는 목회자들마다 좋은 총각을 부탁해서 교회 처녀들 결혼시키기에 바빴다. 식사는 집에서 아침 한끼, 출근하면 바쁘게 일하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해 굶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아내가 “죄수들도 식사시간이 있는데, 당신은 죄수보다 못하다”고 푸념할 때가 있을 정도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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