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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전도사가 된 김만효는 감격해서 주로 노방전도를 많이 했다. 그녀는 1948년에 처음으로 충남 예산의 삽교교회 전도사로 시무했다. 해방 후 10리 떨어진 역리교회 성도들이 교회를 재건하면서 향후 발전을 위해 삽교교회로 재건했다. 당시 강현성 목사가 담임이고 그녀는 여교역자였다. 그런데 얼마 후, 역리교회 신자들이 멀다며 역리에 다시 교회를 재건하자, 그녀는 주일마다 역리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저녁예배는 신유기도로 병자를 치유했다.1950년 6.25전쟁이 나고 그녀는 공산군이 이북 출신과 교역자를 먼저 죽인다는 소문에 당황했다. 그때 그의 안수로 병 고침 받은 청년이 자기 고향으로 가자고 해서 안양의 어느 마을에 가서 살았다. 숨어 예배를 드리는 등 고생을 하다 수복이 되어 삽교로 돌아왔다.1953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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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봉 목사는 평양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서울로 가다가 기차 옆 칸에서 쩡쩡 울리는 전도 목소리를 듣고 찾아 왔다. 전도자가 30대 젊은 여자인 것을 안 이 목사가 먼저 놀랐다. “참, 대단한 여장부로다.” 이 목사가 그녀의 손목을 이끌고 자기 자리로 왔다. 뜻밖에 기차에서 존경하는 이성봉 목사를 만난 그녀는 놀라며 황송했다. 이 목사가 그녀에게 몇 마디 묻고 이름을 물은 후, “우리 교단에 당신 같은 전도자가 필요하다. 내년 4월 중순에 서울 아현성결교회를 찾아오라”고 하며 명함을 주었다.그녀는 서울에서 고향 사람의 집에 머물며 신학교를 수소문했다. 그러다 독립운동가 김구 주석의 귀국환영회가 정동감리교회에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에 찾아갔으나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들어가지 못했다. 그녀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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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07.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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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효는 만주 심양의 언니 집에 얹혀 살면서 언니의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기도했다. 얼마 후,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강사가 성결교회 이성봉 목사였다. 성결교회가 있는 줄 처음 알게된 김만효는 이성봉 목사의 위엄에 찬 바리톤 목소리, 머리와 가슴을 파고드는 말씀, 한없이 영감에 빠져들게 하는 찬송을 통해 큰 은혜를 받았다.“세상에 저렇게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구나!” 김만효는 시간 시간마다 감탄하며 은혜 받았다. 생전에 울어보지 못한 울음을 회개하느라 처음 울었다. 그것은 설교 중에 “아무리 핍박이 와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부모님 공경하는 것을 포기하면 신자가 아니다”는 강사 목사의 말에 가슴이 뜨끔하며 회개한 것이다.그는 집회가 끝나자 곧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정주읍 시댁으로 돌아왔다.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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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0.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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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격한 신랑 후보의 기도 내용에 대해 김 전도사는 생전에 필자와의 만남에서 간단하게 말한 적이 있다.“하나님. 이 여자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내 배필이라면 예수님을 잘 믿게 하시고, 부모공경을 잘하게 하시며, 동기간에도 화목하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당시 신앙의 가정을 위해 이 보다 더 좋은 기도가 없었다. 기도가 김 장로의 마음에 쏙 들어 합격되었다. “믿음으로 사위 감을 구하니까 믿음대로 되었다.” 김 장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즉시 날을 정하여 양가 부모들이 만나 상견례를 했다. 모두 교회 장로의 가정이고, 또 부유한 집안이어서 서로 만족했다.3개월 후, 겨울에 결혼식은 신부의 교회에서 하고, 신부는 신랑을 따라 읍에 있는 신랑의 집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기독교 가정이어서 힘든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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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10.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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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효(金萬孝)는 1913년 12월 30일(음)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우산동에서 큰 농사를 짓는 김 장로의 6남매 중 3녀로 출생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닮아 얼굴이 크고 어깨가 넓어 씩씩하기가 남자 같아서 놀아도 남자아이들 하고만 놀았다. 그의 고향은 1980년 대 초에 압록강을 넘어 온 한인 권사들에 의해 일찍부터 복음이 들어온 지역이다. 이들은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았으나 마침내 몇 년 후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마을은 일찍 개화되었고 교인 남자들은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기 시작했으며, 1910년대에 교회가 마을에 소학교를 세워 마을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한문,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만효가 8살이되어 이 소학교에 입학할 때에야 일제에 의해 소학교로 허가가 났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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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본지 전 편집위원장
2010.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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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회의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과 성서적 창조론, 신론은 일본 국체와 맞을 수가 없었다. 특히 재림교리는 일본인이 세계의 심판자로 자처한데 대하여 명예가 손상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재림의 교리는 일본 천황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이며 일본의 국체를 위반하는 사상이라고 정죄되었다.김하석 목사는 1939년 10월 6일 신사참배 불응의 죄목으로 순교하였다. 일본당국은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복음사역자로, 일본의 집요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성결교회의 신앙의 지조를 끝내 굽히지 않자 그를 죽인 것이다. 김하석 목사는 대구의 보인산에서 일본의 관헌에게 모진 매를 맞았다. 김하석 목사는 체격이 건장하여, 모진 매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자 잔인하고 무지막지한 일본 헌병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두개골을 강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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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06.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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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석 목사는 1929년 3월 3일 밀양지방 감리목사대리 겸 밀양교회 주임으로 파송되었다. 당시 밀양지방은 밀양, 초동, 범평, 봉림, 통영, 진주, 동래, 부산, 삼천포 등 9개 교회로 조직되어 있었다. 김하석 목사의 주재지는 밀양으로 정해졌고 그는 윤순단 전도사와 함께 밀양교회를 목회하며 경상남도 일원을 감리하며 돌보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삼랑진과 김해에 성결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순회지로 지정하고 그 두 지역을 자주 순회하였다.1929년 김하석 목사가 목회하던 밀양교회는 밀양 일대에 성령의 큰 부흥의 역사가 임하기를 기대하며 수개월동안 특별새벽기도회를 진행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먼저 신유의 권능이 나타나 사귀병자 김창윤의 가족 전체가 치유되어 주께 돌아왔다. 한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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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06.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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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석 목사가 안성교회를 시무할 당시 전도열이 대단했다. 안성교회 신자들은 옥산리, 현수리, 구토리, 동문 4개 촌락에서 집회소를 열고 남여신자 40명이 2대로 나누어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밤에 찾아가 주의 복음을 전했는데 100여명이 모여 복음을 경청했다.김 목사는 신식교육기관으로 알려진 협동학교 교사로 봉직했던 교육경력의 경륜과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의 인격을 갖춘 선각자였다. 그는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목회자로서 구령에 대한 열정을 갖고 전도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한편 종교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여 주일학교를 크게 진흥시켰다. 1929년 5월 둘째 주일은 안성교회 유년주일학교 진흥주일로 지켜 교사와 학생들이 심령부흥을 이뤘다. 유년주일학교 진흥주일 행사는 교사들의 사명감을 크게 고취시키는 한편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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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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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석 목사의 부인인 조영복은 독립운동가 조소앙의 딸로 알려져 있다. 조소앙은 본관이 함안으로 1919년 8월, 세계 25개국의 사회당 대표들이 스위스에서 만국사회당대회를 열면서 상해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자 조소앙은 스스로 이 대회에 참석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조소앙은 상해임시정부 외무부장, 국무원비서장 등을 지냈고 김구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만들었다. 1934년에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국시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을 만들었다. 해방 뒤 남북협상 때 평양을 다녀왔고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는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59년에 북한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려졌다.김하석은 1917년 27세 때에 사명자로 부름 받아 경성신학교(서울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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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05.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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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석 목사님은 우리 성결교회 초창기에 함흥, 밀양, 경주 등지에서 교회를 개척하시고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철저히 반대하시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시고 1939년 10월 6일 대구 보인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우리 군산교회는 목사님의 후손들과 함께 목사님의 순교신앙을 본받으려는 마음을 모아 순교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주후 2008년 10월 9일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군산교회 권성만 목사와 성도 일동”군산성결교회 마당 정면에 있는 목양실 출입문 곁에 김하석 목사의 부인 조영복 사모와 그의 영애 김성애 권사가 말년에 섬긴 군산교회 성도 일동이 세운 김하석 목사의 순교기념비 내용이다. 김하석 목사가 1939년 10월 6일 대구 보인산에서 순교할 당시 함께 고난을 받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목사님은 일본경찰에게 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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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
2010.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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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교회는 1935년 경상도 김해에서 전도사역을 하던 김은덕 전도사가 회갑을 맞아 친정 논산에 왔다가 성결교회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개인 전도를 통해 설립한 교회다. 그러나 일제 말에 교회가 해산되며 교회당이 폐쇄되었고 공장으로 사용되다가 해방을 맞아 일본인 적산을 인수, 수리하여 재건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으로 피란을 갔다 오니 교회당이 일부 파괴되어 심 전도사가 부임하여 깔끔하게 수리하여 사용했다.심 전도사는 이듬해 5월 11일 부산에서 열린 교단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감격스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충성을 새롭게 다짐했다. 그는 더욱 기도생활과 성경연구에 매달려 피곤한 심령들에게 은혜의 생수와 만나를 공급했다. 그 결과 그는 성결의 은혜를 받아 얼굴이 더욱 온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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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
2010.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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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울로 들어와 아현동에 셋집을 마련하였으며 그 길로 서울신학교에 가서 졸업반에 복학을 했다. 폐교당한 지 5년 만에 공부를 시작하니 감개가 무량했고, 영어실력이 뛰어난 신학생 정진경 등과 같은 반으로 만날 수 있어서 더욱 감사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했다.그는 어느 교수 목사님의 소개로 성결교회 신자 몇 사람들이 있다는 고양의 벽제에서 고양성결교회 개척에 뛰어들었다. 당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38선을 넘어올 때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 살려주소서. 무사히 남한에 가게 하시면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하고 몇 번이나 기도를 드렸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 기도를 실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자세로 힘썼다.사회가 혼란하고 경제가 몹시 핍절한 시기에 교회개척은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기’였다.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
2010.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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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3일. 일제는 미국 진주만 해군기지를 폭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승리를 위해 일본은 내각이 총사퇴하고 군부 내각이 새로 조직되었으며, 조선을 전시(戰時)체제로 전환하여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모든 면에 통제를 강화했다. 일제는 교회에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했고 일왕숭배 행위를 강조했다.특히 성결교회가 강조하는 사중복음 중 재림사상은 일제에게 매우 거슬렸다. 장차 예수가 천하만국의 왕으로 재림하여 모든 나라를 통치하신다는 재림 교리는 일왕을 멸시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일제는 성결교회 목사의 설교 때마다 형사를 파견했고, 월간지 ‘활천’을 일일이 검열했다가 재림에 대한 글이 많음을 발견, 강제로 1922년 12월호를 끝으로 활천을 폐간하였으며 재림사상을 가르치는 서울신학교도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
2010.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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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월 농한기에 그가 다니던 단천읍 장로교회에서 심령부흥회를 했다. 심신경은 그동안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여 세례를 받고 세례교인이 되었다. 부흥회는 매년 한번 하는 중요한 행사로, 부흥회를 통해 신자들은 신앙이 성장하고 더욱 충성했다. 이 때 오신 부흥강사가 성결교회의 이성봉 목사였다. 그는 직장의 교대시간의 비번에 맞춰 부흥성회에 참석했다.처음 참석한 성회에서 그는 큰 은혜를 받았다. 몇 차례의 부흥회에 참석했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먼저 부흥강사의 체구와 위엄 있는 얼굴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영감이 깃든 굵직한 바리톤 음성은 신비스러워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들려 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가 은혜를 받은 것은 목사님의 메시지였다. 탕자의 이야기를 설교하면서 “회개하라!”고 외치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
2010.04.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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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합병으로 5백년을 지탱해 온 조선이 멸망했다. 일제(日帝)는 한반도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백성을 식민화했고, 서울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일본인 통감정치를 시행했다. 한반도 백성들이 망국(亡國)의 슬픔 속에 허탈해 있던 1915년 4월 10일에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읍 두언대리에서 농업을 하는 청송 심씨 길현 씨의 5형제 중 장남으로 신경(信景)이 고고성을 지르며 태어났다. 아기는 살결이 희고 귀공자의 모습이었지만 약간 허약한 듯해서 그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보약을 다려 먹이는 등 건강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부모의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 6살 때 마을의 서당에 가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웠고, 8살 때 읍에 있는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글과 함께 일본어도 배웠다. 그래서 1928
일화이야기
한국성결신문
2010.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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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한일합병으로 5백년을 지탱해 온 조선이 멸망했다. 일제(日帝)는 한반도를 무력으로 장악하고 백성을 식민화했고, 서울에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일본인 통감정치를 시행했다. 한반도 백성들이 망국(亡國)의 슬픔 속에 허탈해 있던 1915년 4월 10일에 함경남도 단천군 단천읍 두언대리에서 농업을 하는 청송 심씨 길현 씨의 5형제 중 장남으로 신경(信景)이 고고성을 지르며 태어났다. 아기는 살결이 희고 귀공자의 모습이었지만 약간 허약한 듯해서 그의 부모는 어려서부터 보약을 다려 먹이는 등 건강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부모의 사랑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 6살 때 마을의 서당에 가서 천자문(千字文)을 배웠고, 8살 때 읍에 있는 공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한글과 함께 일본어도 배웠다. 그래서 1928
일화이야기
류재하 목사(편집위원장)
2010.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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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1933년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한국기독교는 우상숭배라며 반대했다. 1937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강당에서 목사 장로 등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신사참배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일본에서 파송한 대표 두 사람은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다’, ‘이를 거부하면 비국민으로 규탄 받는다’는 강연을 했다. 그러나 평양 시내 목사들의 추천을 받은 오다 목사는 일본의 신사는 잡다한 귀신, 더욱이 한국민의 원수인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도요구니 귀신에게 참배하라는 것은 역사를 거역하는 언어도단의 망발이며 이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째와 둘째 계명을 어기는 죄악이라고 했다. 강연이 끝나자 청중들은 크게 환영하며 헹가래를 쳤다. 그러나 그는 사복경찰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
2010.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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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가 탄광에서 구함을 받은 후 때마침 그에게 편지가 왔다. 그 편지 봉투에는 일본제국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국화어문장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을 본 탄광 사람들은 모두 놀라 술렁거렸다. “도대체 오다가 누구지?”, 사무실 여직원이 광부 숙소를 찾아와 “오다 나리찌 라는 분이 있어요?”라고 물었다. “예, 나요.”, “당신 정말로 일본사람이요?”, “그렇소.”, “이 편지를 보낸 분을 아세요?”, “아, 폴란드 대사관의 형님에게서 온 편지요.” 여직원은 의외란 듯이 황급히 사무실로 뛰어갔다.곧이어 탄광사무소장이 급히 찾아왔다. “오다 씨, 왜 이곳에 와서 광부가 되었소?”하고 놀란 눈으로 묻는 그에게 오다는 “저는 예수를 전도하러 왔소”라고 말하며 자초지종을 말했다. 소장은 다짜고짜 막장일을 그만 두고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
2010.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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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는 동굴에서 충만한 은혜를 받았고 쌀이 떨어져 주을온천에 내려와 십자가가 있는 건물을 찾아갔다. 교회로 들어섰더니 며칠 전 산에서 만난 전도사가 강단에서 뛰어내려와 오다의 손을 꼭 잡으면서, “잘 왔소, 오늘 밤 수요일기도회에 말씀을 전해주시요”라고 했다. 오다는 극구 사양했지만 결국 강단에 올랐다.30여명의 교인들이 기대어린 눈으로 오다 전도사를 바라본다. ‘아! 드디어 막다른 골목이구나. 하나님, 한국말로 설교할 수 있도록 능력주세요’라고 기도하자 순간 가슴이 뜨거웠다. 더듬거리며 읽던 한글성경이 신기하게도 줄줄 읽어지는 것이었다. 약 1시간 정도를 한국말로 설교를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담임전도사의 요청으로 철야기도회를 인도했다. 은혜가 크게 임했다. 일본인 전
일화이야기
한국성결신문
2010.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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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한 상태로 광주일본교회를 찾은 오다는 담임 다나카 목사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 다나카 목사는 정신을 차린 오다에게 연유를 듣고 충고를 했다. 한국인에게 전도하려면 일본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일본제국과 천황폐하에 대한 지조를 파는 일이라는 것이다. 오다는 이 일로 밤낮으로 매달려 기도했더니 응답이 왔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고민이 해결되는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다.다나카 목사는 오다에게 서울에 가면 미국선교사 게일 목사를 만나라면서 소개장과 돈 2원을 손에 쥐어줬다. 오다는 거의 먹지 못한 채 걸어가다가 폭우를 만나 굴다리로 들어갔다. 나병환자들의 거처였다. 그들이 먹다 남은 밥으로 배를 불리고 그들의 틈에 끼어서 잠에 취했다. 천신만고 끝에 오
일화이야기
이종무 목사
2010.03.13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