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과 성장, 부친의 구혼광고
김만효(金萬孝)는 1913년 12월 30일(음)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우산동에서 큰 농사를 짓는 김 장로의 6남매 중 3녀로 출생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닮아 얼굴이 크고 어깨가 넓어 씩씩하기가 남자 같아서 놀아도 남자아이들 하고만 놀았다. 그의 고향은 1980년 대 초에 압록강을 넘어 온 한인 권사들에 의해 일찍부터 복음이 들어온 지역이다.
이들은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에게 핍박을 받았으나 마침내 몇 년 후에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마을은 일찍 개화되었고 교인 남자들은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기 시작했으며, 1910년대에 교회가 마을에 소학교를 세워 마을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한문,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만효가 8살이되어 이 소학교에 입학할 때에야 일제에 의해 소학교로 허가가 났다.
그의 가정은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였으며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버지가 장로로 봉사했다. 그러한 가정의 영향으로 그는 모태신자로 태어나 2살에 유아세례를 받았고, 4살 때부터 교회의 유치부에 다니기 시작하였으며 유년부 때는 성경의 좋은 구절을 힘차게 많이 외어 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7살 때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읍에서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다 일본 경찰의 총에 맞아 40여명이 죽임을 당했다. 이것이 ‘곽산 학살사건’으로, 이 슬픈 소식을 듣고 그는 분개해서 “일본사람은 나쁜 놈”이라고 소리쳤다. 14살에 소학교를 졸업하자 친구들은 대부분 집에서 어머니를 도와 살림을 배웠는데, 그의 부친은 선각자답게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며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세워진 영창의숙(중학과정)에 그를 진학시켰다. 그는 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면서 아이들에게 성경도 가르쳤다. 가끔 어린이부 설교도 했는데 타고난 재간이 있어 말을 잘했다.
20세가 되자 부친이 결혼을 서둘렀다. 위로 언니와 오빠도 신앙의 좋은 짝을 만나지 못해 아쉬워하던 부친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효는 신앙이 좋은 신랑을 얻어주려고 했다. 그래서 기도하던 중, 어떤 지혜가 생각났다. 부친은 집에서 붓글씨로 쓴 커다란 광고지를 면사무소 게시판에 가서 붙였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구혼광고였기 때문이다. “내 딸은 영창의숙을 졸업한 방년 20세! 독실한 세례교인 신랑감을 구하니, 뜻이 있는 자는 목사가 발행한 세례증명서를 가지고 0월 0일까지 우리 집으로 찾아오기 바람.-우산동교회 김00 장로.” 이 광고를 본 사람들은 처음 보는 구혼광고에 어리둥절했고 이 소문이 삽시간에 온 마을로 번졌다. 어떤 총각들은 이 구혼광고를 보고 “장가를 잘 갈려면 교회에 다녀야겠다”며 스스로 교회를 찾아 등록하여 교회를 잘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마침내 그날이 되자, 그의 집으로 각 마을의 교회 청년 9명이 세례교인 증명서를 손에 들고 찾아왔다. 김 장로가 그들을 모두 방으로 모아 놓고 보니 재미있었다. 키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얼굴의 흰 사람과 검은 사람,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과 어리게 보이는 사람, 옷을 잘 입은 사람과 별로인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그의 부친이 각각 세례증명서를 확인한 후, 한 사람씩 불러내어 만효와 함께 만나 기도를 시켰다. 부친이 기도 못하거나 서툰 사람은 돌려보내고, 기도를 잘 한 홍성도라는 총각을 선정했다. 신상을 자세히 물어보니 정주읍교회 홍 장로의 장남으로 얼굴도 준수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