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교회, 북아현교회 목회, 미국 이민

논산교회는 1935년 경상도 김해에서 전도사역을 하던 김은덕 전도사가 회갑을 맞아 친정 논산에 왔다가 성결교회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개인 전도를 통해 설립한 교회다. 그러나 일제 말에 교회가 해산되며 교회당이 폐쇄되었고 공장으로 사용되다가 해방을 맞아 일본인 적산을 인수, 수리하여 재건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으로 피란을 갔다 오니 교회당이 일부 파괴되어 심 전도사가 부임하여 깔끔하게 수리하여 사용했다.

심 전도사는 이듬해 5월 11일 부산에서 열린 교단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감격스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주님을 위한 충성을 새롭게 다짐했다. 그는 더욱 기도생활과 성경연구에 매달려 피곤한 심령들에게 은혜의 생수와 만나를 공급했다. 그 결과 그는 성결의 은혜를 받아 얼굴이 더욱 온화해졌고, 설교에 영력이 더 충만하여 신자들이 큰 은혜를 받았다.

은혜 받은 신자들이 열심히 전도하여 주일마다 새 신자들이 늘어나, 부임한지 3년 만에 작은 교회건물에 더 이상 신자를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들이 열심히 헌금하여 150평의 대지를 매입, 35평 교회를 신축하고, 철제 종탑도 세워 교회의 위용을 드러냈다.

그는 교회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주일학교 교육에 힘을 쏟았다.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번은 주일학교 설교를 하고 교사들을 격려했다. 은혜를 받은 주일학생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학생회가 크게 부흥되어 왕성했다. 1950년대 논산교회 학생회 임원들 중 손덕용, 김갑태, 왕상원, 정충도, 임헌평, 안풍성, 박소암 등이 사명을 받아 헌신하여 성결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장로나 권사, 집사가 되어 충성한 분들이 무수히 많다.
그러나 1961년 성결교회 분열의 폭풍 속에 논산교회는 큰 고통을 당했다. 그때 NCC 탈퇴문제로 보수파들이 총회석상에서 퇴장할 때 심 목사도 보수파에 속했다.

당시 NCC는 용공주의 WCC에 속했다는 소문 때문에 북한에서 공산주의의 정체를 안 심 목사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보수파들이 이듬해 예성을 창립할 때 가담하였다. 그러나 논산교회의 개척자인 김은덕 전도사의 가족들이 기성교단 탈퇴를 반대했다. 교회는 계속 분쟁이 일어났고, 지지하는 신자 수가 모자란 김 전도사측은 교회 종탑아래 천막을 치고 3년 동안 예배를 드리다가 3년 만에 근방에 160평 대지를 매입하고 교회를 개척하여 논산제일교회(기성)를 설립했다. 당시의 논산교회의 분쟁이 아주 심해 일간지에 까지 날 정도여서 모두 한탄했다.

심 목사는 1963년 4월에 논산교회를 사임하고, 서울의 북아현교회(예성)로 전임했다. 1937년에 설립된 교회였지만, 부임 당시는 작은 교회여서 그의 기도와 열정적인 설교에 감화 받은 신자들이 계속 증가되어 3백 명이 돌파되는 중형교회가 되었다. 1969년에는 예성 서울지방회장을 역임하고, 1971년에 성전건축을 착수하여 1년 반 만에 완공, 헌당예배를 드렸다.

그는 1973년 성결교회 제2차 합동운동에 참여했다. 그때는 기성이 10년 전 NCC를 탈퇴한 후였고, 북아현교회 장로들이 합동을 원해 기쁘게 가담, 80여 개 교회가 본 교단(기성)으로 합동하는데 공헌했다. 그는 1985년 4월 28일 정년으로 북아현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되어, 목회 38년 만에 공적인 활동을 마감했다.

그는 한 달 후, 미국에 사는 자녀들의 초청으로 부부가 함께 이민하여 나성북부교회에 출석하면서 한국 이민교회들을 순방하며 목사들과 교제하며 노후생활을 평안히 보내다 2001년 7월 22일에 87세로 하나님의 나라로 부르심 받았다. 장례식은 북아현교회 김수영 목사가 도미해서 집례, 그의 삶의 대미를 장식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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