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 신학 중단과 귀향, 광복과 월남

1941년 12월 3일. 일제는 미국 진주만 해군기지를 폭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쟁 승리를 위해 일본은 내각이 총사퇴하고 군부 내각이 새로 조직되었으며, 조선을 전시(戰時)체제로 전환하여 정치·경제·문화·사회 등 모든 면에 통제를 강화했다. 일제는 교회에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했고 일왕숭배 행위를 강조했다.

특히 성결교회가 강조하는 사중복음 중 재림사상은 일제에게 매우 거슬렸다. 장차 예수가 천하만국의 왕으로 재림하여 모든 나라를 통치하신다는 재림 교리는 일왕을 멸시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일제는 성결교회 목사의 설교 때마다 형사를 파견했고, 월간지 ‘활천’을 일일이 검열했다가 재림에 대한 글이 많음을 발견, 강제로 1922년 12월호를 끝으로 활천을 폐간하였으며 재림사상을 가르치는 서울신학교도 폐교시켰다.

심신경은 동료 신학생들처럼 어쩔 수없이 신학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교회의 목사님을 도왔다. 1943년 3월에 친척의 중매로 북청의 기독교 가문의 이갑춘 양과 결혼했다. 그가 28세, 아내가 20세였다. 그는 신앙이 좋은 아내의 격려로 목회자가 되기 위해 당시 서울 남산에 있는 조선신학원(장로교)에 편입하여 공부했다. 하지만 성경의 해석이 성결교회의 사상과 맞지 않아 많은 갈등을 느꼈다.

그러는 동안 1943년 5월 전국 성결교회 교역자 2백여명이 각 경찰서에 체포되어 심문과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루었고, 마침내 그 해 12월 29일에 성결교회가 일제에 의해 해산 당하여 교회가 폐쇄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그는 평소 존경하는 성결한 스승 목사님들의 고통에 더 이상 공부하고 싶은 의욕이 모두 사라져 1944년 10월에 조선신학원을 중퇴하고 말았다. 그리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모 교회를 도우면서, 조국의 해방과 성결교회의 재건을 위해 새벽마다 눈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45년 8월 15일 정오에 일왕이 침통한 음성으로 항복 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는 귀를 의심했지만, 거리에는 방송을 들은 백성들이 쏟아져 나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드디어 조국이 일제의 사슬에서 해방된 것이다. 수많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된 것이다. 그는 감격스런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후, 거리로 뛰쳐나갔다.

조선의 사회가 승리감에 취해 들떠 있는 동안 한반도는 1945년 2월 얄타회담에 따라 북위 38도선에 남북의 경계가 그어져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군정이 실시되었다. 남한은 민주주의자와 공산주의자가 대립하였고, 북한은 소련 군부를 대신해 김일성이 권력을 잡고 일방적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흩어진 성결교회의 지도자들 3백 여명이 그 해 9월 첫주일에 경성신학교 강당에 모여 광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후, 11월 9일에 다시 모여 성결교회재흥총회를 개최하여 재건했고, 신학교도 복교하였다. 심신경이 신학교에 복학하기 위해 서울로 가려고 했지만, 38선에 소련군이 남하하는 사람들을 총살한다는 흉흉한 소식에 일단 중지했다.

북한 김일성 정권의 탄압으로 기독교인들이 하나 둘, 남한으로 떠났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임신한 아내와 함께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각오로 결단하고, 안내자를 따라 봇짐을 지고 춥고 험한 산길로 끝없이 갔다. 삼엄한 경계를 피해 산길로만 오던 일행은 일주일 만에 남한 땅 동두천에 들어섰다. 1947년 3월 중순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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