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김하석 목사의 출생

“김하석 목사님은 우리 성결교회 초창기에 함흥, 밀양, 경주 등지에서 교회를 개척하시고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철저히 반대하시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시고 1939년 10월 6일 대구 보인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우리 군산교회는 목사님의 후손들과 함께 목사님의 순교신앙을 본받으려는 마음을 모아 순교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주후 2008년 10월 9일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군산교회 권성만 목사와 성도 일동”

군산성결교회 마당 정면에 있는 목양실 출입문 곁에 김하석 목사의 부인 조영복 사모와 그의 영애 김성애 권사가 말년에 섬긴 군산교회 성도 일동이 세운 김하석 목사의 순교기념비 내용이다. 김하석 목사가 1939년 10월 6일 대구 보인산에서 순교할 당시 함께 고난을 받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목사님은 일본경찰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였고 흉기를 든 일본경찰들이 마구잡이로 때리다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칠 때 쓰러졌고, 끝까지 조국과 하나님을 배신하지 아니하고 불굴의 의지로 순교하셨다”라고 증언한다.

그의 부인 조영복 사모와 그의 자녀 중 유일하게 생존한 딸 김성애 권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일본의 식민치하에서 그의 부친의 대를 이어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일본경찰에게 늘 수배를 당해 평생을 쫓기는 생활이었다고 한다. 김하석 목사는 부친의 대를 이어 협동학교 교사로 봉직하였고, 독립운동가로 순국한 부친의 정신을 이어 독립운동을 하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복음사역에 헌신했다.

1920년 경성신학교를 졸업하고 통영교회를 시작으로 복음사역에 헌신할 때에도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고 구금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설교는 끊임없이 압수의 대상이어서 설교원고를 독에 감춰두거나 벽 틈에 숨겨놓아도 집요하게 독을 뒤져내고 벽을 헐어서 용케 찾아내어 압수하여 이를 트집 잡아 구금하고 심문하고 고문을 가하였다.

그는 한곳에서 목회를 차분하게 계속할 수 없어서 임지의 이동이 매우 잦았다. 1920년에 통영에 파송되어 통영교회를 개척한지 1년도 채 안되어 일본경찰에게 시달려서 통영에서 멀리 철원교회 주임 교역자로 부임했고 2년 후에 또다시 더 머나먼 북쪽 함경남도로 피하여 함흥교회로 부임했다. 그리고 1926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함흥교회 건축의 뜻을 접고 1928년에는 안성교회로 부임하였고 다시 1929년에는 경남 밀양지방 감리목사 겸 밀양교회 주임으로 부임했으나 그해 9월 하순에는 병고로 휴직한 후 공식 기록은 없지만 함양교회에서 시무했다고 한다.

김하석 목사는 1890년 경상남도 청송에서 부친 김기수 장로의 3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김기수는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협동학교 교사로 봉직했다. 한성사범학교는 1895년에 설립된 대한제국 최초의 근대화교육기관이다. 김기수는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제에 의해 순국했다. 그의 이름이 경상남도 청송에 건립한 3·1운동기념탑에 애국지사로 기록되어 있다. 김하석 목사는 대구중학교 1회 졸업생으로 부친이 봉직했던 협동학교의 교사로 봉직했다.

김하석 목사의 부인 조영복 사모는 대구 동산기독병원의 제1호 간호사로 당시 신식여성으로 선망되는 인텔리여성이었다. 대구 동산기독병원은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존슨(W. O. Johnson)이 1899년 11월초 의약소를 설치한 것이 그 기원이 된다. 1917년 서양식 병원건물을 마련했으며 당시 병원의 병설 간호학교가 활발한 발전을 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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