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철원, 함흥교회의 목회

김하석 목사의 부인인 조영복은 독립운동가 조소앙의 딸로 알려져 있다. 조소앙은 본관이 함안으로 1919년 8월, 세계 25개국의 사회당 대표들이 스위스에서 만국사회당대회를 열면서 상해임시정부에 대표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하자 조소앙은 스스로 이 대회에 참석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조소앙은 상해임시정부 외무부장, 국무원비서장 등을 지냈고 김구 이시영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만들었다. 1934년에 삼균주의(三均主義)를 국시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국강령’을 만들었다. 해방 뒤 남북협상 때 평양을 다녀왔고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는 6?25전쟁 때 납북되어 1959년에 북한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하석은 1917년 27세 때에 사명자로 부름 받아 경성신학교(서울신학대학교 전신)에 입학하여 1920년 그의 나이 30세에 김응조 김규호 등 19명과 함께 제9회 졸업생으로 졸업했다. 김하석 전도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그해에 통영에 파송되어 통영교회를 창립했다. 김하석 목사는 몸이 건장한 장사였고 웬만한 고통도 잘 감내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통영교회는 1920년 5월 20일에 민 라 선교사가 전도대를 이끌고 2주간의 장막전도를 한 결과 구도자가 70여명이나 되었다. 본부에서는 통영에 주임으로 김하석(金河錫) 전도사, 부임으로 경성신학원의 졸업 동기 박달문 전도사와 역시 졸업동기 여교역자 김안나 전도사를 파송했고 한옥 한 채를 500여환에 매수하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김하석 전도사는 1921년 철원교회 주임으로 파송되었다. 그가 두 번째로 부임한 철원교회는 성결교단에서 매우 비중이 있는 교회였다. 당시 철원은 강원도 내의 큰 읍으로서 동양선교회는 전략적인 차원에서 1914년에 이곳에 교회를 설립했다. 김 전도사는 2년 동안 철원교회에서 사역한 후 1924년에 개척을 위해 함흥으로 파송된다.

김 전도사는 한옥을 매수하여 그해 6월부터 함흥교회를 설립하고 예배를 드렸다.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장막전도를 실시하여 90여명의 구도자를 얻었다. 교회는 부흥 성장하여 예배당이 비좁아 새로운 예배당 건축이 시급했다. 함흥교회는 교단의 기관지 ‘활천’ 구독운동을 장려하여 14명의 성도가 이를 애독하는 등 성도들을 영성과 지성을 갖춘 건강한 신앙인으로 양육하였다. 활천은 당시 한국교계의 큰 호평을 받는 신앙잡지로서 교계에 영향력이 있는 교단의 기관지였다.

김하석은 1926년에 연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함흥교회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고자 했으나 그곳에서도 더 머무를 수 없어서 교회당 건축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8년 5월에 안성교회 주임교역자로 부임했다. 당시 안성은 경기도의 3대 읍 가운데 하나로 가구가 4천호에 이르고 인구가 2만에 이르고 있었다.

안성교회는 경기남부지방의 모교회로서 1917년 정 빈 전도사에 의해 교단에서 14번째로 개척된 교회다. 당시 안성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텃밭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 교단의 영향력이 큰 상황이었으나 안성교회는 장막전도를 중심으로 꾸준히 성장했으며 교단최초의 자립교회라는 기록도 남겼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