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학 중 고양교회 개척과 6. 25 동란

그는 서울로 들어와 아현동에 셋집을 마련하였으며 그 길로 서울신학교에 가서 졸업반에 복학을 했다. 폐교당한 지 5년 만에 공부를 시작하니 감개가 무량했고, 영어실력이 뛰어난 신학생 정진경 등과 같은 반으로 만날 수 있어서 더욱 감사하며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했다.

그는 어느 교수 목사님의 소개로 성결교회 신자 몇 사람들이 있다는 고양의 벽제에서 고양성결교회 개척에 뛰어들었다. 당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그는 38선을 넘어올 때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 살려주소서. 무사히 남한에 가게 하시면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하고 몇 번이나 기도를 드렸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 기도를 실천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는 자세로 힘썼다.

사회가 혼란하고 경제가 몹시 핍절한 시기에 교회개척은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하기’였다. 어느 신자의 안방에서 세 사람이 모여 시작한 개척교회는 그의 뜨거운 기도와 열심 있는 전도와 설교로 몇 달 만에 20여명이 모였고, 제법 큰 방 하나를 임시 교회당으로 세를 얻었다. 교역자 사택을 겸해서 사용한 이곳에서 첫딸 은실이가 태어났다.

이듬해(1948년) 4월에 그는 서울신학교를 졸업하고 정식 전도사가 되었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해 5월에 우리나라는 첫 국회의원 선거를 하고, 8월 15일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한 정부를 수립하여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취임했다. 그는 나라를 잃은 지 38년 만에 새로운 정부의 국민이 된 기쁨을 감격스럽게 맞으면서, 이 나라가 길이 발전하도록 기도했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하였고 소련제 탱크로 중무장한 인민군은 탱크 하나 없는 국군을 밀어붙여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이 저들에게 함락됐다. 그는 북한에서 공산세력의 만행을 몸소 겪었기에 피란을 가려다가 ‘목자가 없는 양들’을 생각하고, 양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피란을 포기했다.

그는 아침마다 간단한 식사 후, 허름한 옷을 입고 밀짚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성경과 찬송가를 싼 보자기를 들고 아무도 몰래 높은 산등성이에 있는 신자의 콩밭, 으슥한 곳에 가서 숨어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하루 종일 기도와 성경을 읽고 또 기도했다. 기도제목은 공산군이 멸망하고, 국군이 승리하여 다시 신앙의 자유를 찾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 해 8월 초 어느 날, 사모가 간밤의 꿈이 이상하다며 아침도 먹지 않고 콩밭으로 남편을 내보낸 이른 아침이었다. 사모가 아이들과 아침을 먹고 있을 때 공산당원 두 사람이 들이닥쳐 심 전도사를 찾았다. 며칠 전에 나갔다는 사모의 말을 믿지 못하고 그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졌고 찾지 못하자, 다른 교회들을 찾아가 그곳 목사들을 데리고 갔다.

공산당원들은 이날 고양에 있는 목사들과 사회지도급 인사들을 데리고 의정부 쪽으로 갔다. 그들은 서울에서 잡혀오는 목사나 사회지도자들과 합류, 손목마다 서로 끈으로 묶어서 도망하지 못하도록 하고 걸어서 북으로 납치했다. 그들은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날 꿈이 이상하다는 사모의 지혜로 심 전도사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 해 9월 2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사흘 만에 서울을 탈환했다. 북으로 도망친 공산군은 압록강까지 후퇴했으나 그해 11월 하순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반복하며 서로 공방전을 벌였다. 비록 전쟁 중이지만 겨우 삶의 터전으로 돌아 온 신자들은 심 전도사의 가르침에 따라 불안 속에서도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 그래서 신앙이 뜨거워졌고, 전도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21일에 그는 충남 논산성결교회의 청빙을 받아 목회 사역지를 옮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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