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반대 강연으로 치른 곤욕

일제는 1933년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한국기독교는 우상숭배라며 반대했다. 1937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강당에서 목사 장로 등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신사참배에 대한 강연이 있었다. 일본에서 파송한 대표 두 사람은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다’, ‘이를 거부하면 비국민으로 규탄 받는다’는 강연을 했다. 그러나 평양 시내 목사들의 추천을 받은 오다 목사는 일본의 신사는 잡다한 귀신, 더욱이 한국민의 원수인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도요구니 귀신에게 참배하라는 것은 역사를 거역하는 언어도단의 망발이며 이는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의 첫째와 둘째 계명을 어기는 죄악이라고 했다. 강연이 끝나자 청중들은 크게 환영하며 헹가래를 쳤다. 그러나 그는 사복경찰관에 의해 평양경찰서로 끌려갔다. 닷새 동안의 강연내용을 모두 쓴 후 평양경찰서장의 교시를 받고 서울로 올라왔다.

어느 날, 형사 세 사람이 들어서서 불문곡직하고 가택수색을 하더니 “너 이놈, 나쁜 놈아. 너 같은 악질은 혼 좀 나야 돼”라며 오다 목사의 일기장 등을 압수하고 경기도경찰국 지하실에 구금시켰다가 수원경찰서로 이송했다. 수원경찰서에서는 일본 군인들이 수원 인근 제암리교회에 사람을 모아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 안에서 22명이 죽고 교회 뜰에서 6명이 죽는 학살사건 이후 검문검색을 강화했다. 그 무렵 숭실전문학교 학생 박중학(朴重學)이 고향 순천으로 내려가다가 검문당해 오다 목사의 강연을 듣고 기록한 일기장과 오다 목사의 명함이 문제가 되어 수원경찰서까지 오게 되었다. 형사는 오다 목사의 옷을 벗기고 눈 위에 무릎 꿇리고 등 위에 눈덩이를 올려놓았다.

어느 날 서장이 배불리 먹인 다음, 한국인이 전쟁소모품이 되도록 설득해달라고 회유했다. 오다 목사는 책상을 치면서 나는 한국인을 진실로 사랑한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순사들이 검도장으로 끌고 가서 구둣발로 사정없이 찼다. 두 손을 포승줄로 묶어서 3일 동안이나 천정에 매달아 놓았다. 5개월 후 ‘치안유지위반 및 조선독립운동선동자’란 죄목으로 서울형무소로 이감되어 검찰청에 출두했다. 오다는 전도밖에는 한 일이 없다며 그가 한국에 온 경위와 행적을 말해줬다. 검사는 한국에서 전도하지 않는 조건으로 석방하고 일본으로 추방했다. 오다는 일본신학교(현 동경신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미가와시마한국인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이후 한국인교회에만 부임했다.

해방 이후 후쿠오카한인교회는 죽을 때까지 우리 한국인교회의 목사가 되어야 한다며 오다 목사를 모셨다. 후쿠오카 부두에 귀국선을 기다리는 한국인 5천여 명이 북적거렸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장례를 치러주며 그들을 돌봤다. 오다 목사는 일본인 이름이어서 한국인들이 거리감이 있음을 알고 명실상부한 한국인이 되기 위해 한국이름으로 개명했다. 오다(織田)의 첫 자(織)를 떼어내고 성을 전(田)으로 했다. ‘영원’을 뜻하는 영(永)자와 후쿠오카(福岡)에 있다고 해서 복(福)자를 사용하여 전영복(田永福)이라 했다. 영복은 영원한 복음을, 전은 입구(口) 안에 십자가(十)가 들어있어 입으로 십자가를 전하는 사명자임을 연상해 보았다.

그 후 전영복은 교토(京都)한인교회 담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일본교회가 한국에게 준 과거 상처를 감싸주게 하여 재일한국인과 일본인이 화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전영복은 1970년 22년을 경도한인교회의 사역에서 은퇴하고 일본에 있는 한국인에게 전도한다면서 재일대한기독교 전도국의 간사로 전도활동에 임했다. 일본의 연약한 교포교회를 돌보며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교포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교회개척을 추진했다. 그는 1980년 9월 27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20세기 한일역사에서 하나님의 제단을 밝힌 커다란 촛불이었다. 그 촛불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타버린 생애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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