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해 목사의 길을 걷다

오다가 탄광에서 구함을 받은 후 때마침 그에게 편지가 왔다. 그 편지 봉투에는 일본제국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국화어문장이 새겨져 있었고 그것을 본 탄광 사람들은 모두 놀라 술렁거렸다.

“도대체 오다가 누구지?”, 사무실 여직원이 광부 숙소를 찾아와 “오다 나리찌 라는 분이 있어요?”라고 물었다. “예, 나요.”, “당신 정말로 일본사람이요?”, “그렇소.”, “이 편지를 보낸 분을 아세요?”, “아, 폴란드 대사관의 형님에게서 온 편지요.” 여직원은 의외란 듯이 황급히 사무실로 뛰어갔다.

곧이어 탄광사무소장이 급히 찾아왔다. “오다 씨, 왜 이곳에 와서 광부가 되었소?”하고 놀란 눈으로 묻는 그에게 오다는 “저는 예수를 전도하러 왔소”라고 말하며 자초지종을 말했다. 소장은 다짜고짜 막장일을 그만 두고 사무소에서 일하라며 이력서를 쓰게 했다. 이력서를 본 사무소장은 “음 명필이로군, 학벌도 좋고!”라고 말했다.

마침 넓은 사무소 한쪽에서 사람들이 측량도면을 펼쳐놓고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는데 측량의 기초적인 수학공식인 사인 코사인에 대한 것도 모르고 어림짐작으로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 오다가 끼어들었다. “무엇이 안 풀려요?”라고 일본말로 묻자 소장이 “오다 씨는 측량할 수 있어?”라고 말했다. “예, 중학교에서 수학시간에 사인 코사인을 배워서 간단한 도면 정도는 그릴 줄 압니다.” 이렇게 해서 오다는 사무소에서 일하며 4~5개월에 걸려서 탄광측량을 훌륭히 마쳤다.

소장은 오다에게 “본사에서 교회를 지어주기로 했으니 한국인에게 희망과 의욕을 갖게 해주게”하고 칭찬과 부탁을 했다. 오다는 박 씨를 첫 신자로 삼아 1년 동안 탄광촌교회에서 고달픈 광부들의 선한 이웃이 되었다.  

오다는 1928년 4월 29일 20세에 4년 동안 한국 북부와 서부지방을 누비며 전도를 위한 여행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1932년 봄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성경을 한국말로 깊이 공부하고 목사안수를 받기 위해서였다. 경성성서학원에 입학을 하게 된 것은 전도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안성교회 박형규 목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그는 박 목사와 교분을 가진 뒤 친형제처럼 지냈다. 죽을 때도 같이 죽자고 할 정도로 절친했다. 박 목사는 오다 전도사의 진실함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매우 훌륭한 전도사로 여겼다. 오다 전도사도 박 목사를 존경했기 때문에 박 목사의 권유를 받아들여 경성성서학원에 입학을 하였고 입학과 동시에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의 소속이 되었다.

경성성서학원은 봄과 가을학기로 나눠 한 학기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한 학기는 교회를 순회하면서 전도했는데 그는 걸어서 13도와 군까지 샅샅이 다녔다. 1932년 7월 6일 청주성결교회 전도집회, 11월 27일 영등포성결교회 창립기념집회 인도, 1933년 7월에는 정읍성결교회에서 전도 집회를 열었다.

그는 경성성서학원에서 한국의 학문을 제대로 교육 받은 느낌을 가졌다. 1934년 봄 2년의 수련 끝에 졸업하자 그는 자원하여 가난한 서민이 많은 천연동성결교회 주임전도사로 부임했다. 1935년 봄, 그는 도쿄에서 일본호리네스교단의 연회에 참석하여 목사안수를 받았다.

서울에 돌아온 오다 목사는 곧 천연동교회를 사임하고 서울에서도 빈민가로 이름난 독립문 밖의 현저동에 조그만 셋집에서 가시꼬 양과 새 가정을 꾸몄다. 그리고 조선복음교회의 간판을 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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