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전도와 강화군 5개 성결교회 개척

비로소 전도사가 된 김만효는 감격해서 주로 노방전도를 많이 했다. 그녀는 1948년에 처음으로 충남 예산의 삽교교회 전도사로 시무했다. 해방 후 10리 떨어진 역리교회 성도들이 교회를 재건하면서 향후 발전을 위해 삽교교회로 재건했다. 당시 강현성 목사가 담임이고 그녀는 여교역자였다. 그런데 얼마 후, 역리교회 신자들이 멀다며 역리에 다시 교회를 재건하자, 그녀는 주일마다 역리교회에 가서 설교하고 저녁예배는 신유기도로 병자를 치유했다.

1950년 6.25전쟁이 나고 그녀는 공산군이 이북 출신과 교역자를 먼저 죽인다는 소문에 당황했다. 그때 그의 안수로 병 고침 받은 청년이 자기 고향으로 가자고 해서 안양의 어느 마을에 가서 살았다. 숨어 예배를 드리는 등 고생을 하다 수복이 되어 삽교로 돌아왔다.

1953년에 예산읍 감리교회 신자들이 밤에 그를 찾아왔다. 성결교회가 은혜가 많으니 읍에다 성결교회를 세워달라고 했다. 그녀는 신바람이 나서 그날 밤 그 신자들과 함께 읍으로 가서 잠을 잤다. 그리고 이튿날 조그만 2층집을 하나 얻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예산성결교회의 시작이다. 교회가 부흥되자 황대식 전도사에게 교회를 맡기고, 그는 목리에 가서 교회를 개척했다. 총회장을 지낸 이정익 목사가 그때 목리교회 주일학교 출신이다.

몇 년 후, 교회가 부흥되자 김 전도사는 교회 건축에 착수했다. 그녀는 밤마다 철야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다. 가난한 시골교회 신자들은 한계가 있었다. 그는 기도 중 문득 인천송현교회 황성주 목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도원 집회를 인도하다가 교회에 한번 찾아오라던 말이 생각나 이튿날 버스로 당진에 가서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탔다. “하나님, 내 발걸음이 헛되지 않게 인도하소서.” 그녀는 계속 기도하면서 갔다. 황성주 목사는 갑자기 찾아 온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없자, 내일 새벽기도에 세워 줄테니 신자들에게 호소해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날 밤 교회 기도실에서 철야기도를 한 후, 이튿날 새벽강단에 섰다.

그녀는 “내 소원은 한국이 복음화 되는 것이고, 동네마다 마을마다 성결교회를 세워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간증했다. 이 때 인천경찰서장의 부인 유숙화 권사가 은혜를 받아 그녀에게 아침식사를 대접하면서 “전도사님, 내 소원도 우리 고향 강화에 성결교회를 세우는 것인데 어쩜 내 소원과 꼭 같아요? 목리교회 건축비는 제가 부담할 테니 그 대신 우리 고향 강화에 성결교회를 세워주세요”라고 말했다. 김 전도사는 “할렐루야!”라며 즉시 응답했다.

약속대로 그녀는 목리교회 건축을 마치고 강화도로 갔다. 강화는 마을마다 감리교회가 있었는데 그녀가 먼저 덕포리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자 감리교 목사와 신자들이 방해했다. 그녀는 “전도를 방해하는 것은 마귀의 짓이다”라고 담대히 외치며 맞섰다. 그의 영력 있는 담대한 외침에 감리교회 다니다 만 신자들이 와서 신자가 됐다.

교회가 날로 부흥됐다. 그녀는 허름한 집을 사서 교회를 짓고 신자들이 40명이 되면, 젊은 남자 교역자에게 맡기고 또 다른 마을로 가서 개척했다. 이렇게 그녀는 감리교회의 섬이라는 강화도에 덕포리교회, 불은교회, 선두리교회, 마니성산교회, 고비교회 등 성결교회를 5개나 세웠다. 그녀는 5교회를 순회하며 예배드렸고 자립할 때까지 아는 목사나 장로, 권사들을 찾아 생활비를 얻어다 목회자들을 격려하는 사랑의 종이었다. 그녀는 개인전도에 힘쓰다 2001년 둘째 딸을 따라 호주로 이민 가서 살다가 2005년 그곳에서 93세로 소천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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