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생활과 남편의 전사

합격한 신랑 후보의 기도 내용에 대해 김 전도사는 생전에 필자와의 만남에서 간단하게 말한 적이 있다.
“하나님. 이 여자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내 배필이라면 예수님을 잘 믿게 하시고, 부모공경을 잘하게 하시며, 동기간에도 화목하게 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당시 신앙의 가정을 위해 이 보다 더 좋은 기도가 없었다. 기도가 김 장로의 마음에 쏙 들어 합격되었다. “믿음으로 사위 감을 구하니까 믿음대로 되었다.” 김 장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즉시 날을 정하여 양가 부모들이 만나 상견례를 했다. 모두 교회 장로의 가정이고, 또 부유한 집안이어서 서로 만족했다.

3개월 후, 겨울에 결혼식은 신부의 교회에서 하고, 신부는 신랑을 따라 읍에 있는 신랑의 집에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기독교 가정이어서 힘든 시집살이는 아니었지만 위로 시부모와 시조부모, 아래로 시동생과 올케 등 식구가 많아 바쁘게 살았다. 그는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시원시원해 일을 잘 처리했고 시부모께 인정을 받았다.

결혼한 지 7년 만에 딸을 두 명이나 낳아 길렀다.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해 시아버지는 아무 소리를 안했으나 시어머니가 가끔 싫은 소리를 하며 아들타령을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아,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지 않으시는데, 내가 어떻게 마음대로 아들을 낳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녀는 주일이면 두 딸을 데리고 주일학교에 가서 성경과 찬송을 배우게 했고, 끝나면 옆에 데리고 장년예배까지 드리며 두 딸이 남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키워달라고 기도했다. 그녀는 그런대로 행복한 가정과 교회생활에 만족했다.

1939년 어느 날, 남편 앞으로 붉은 영장이 날아들었다. 붉은 글씨로 인쇄된 영장은 군대 징집령 문서였다. 1910년 조선을 합병한 일본제국은 조선의 농산물과 석탄, 아연 등 공출로 일본경제 혜택이 늘어나자 드넓은 중국대륙을 넘보기 시작했다. 이미 1894년 신식무기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가 커다란 늙은 곰에 불과하다고 생각, 노구교 사건을 계기로 군인을 증파하여 북경과 천진 등을 점령하고 확전시켜 수도 남경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일본의 욕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인도네시아까지 진격하여 소위 대동아전쟁을 일으키더니 1941년에는 미국의 진주만을 폭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은 세계를 석권하려는 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음으로 마침내 ‘세계 제2차 대전’으로 비화되었다.

작은 국가 일본으로서 이 엄청난 탐욕을 채우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막대한 군대와 군수물자였다. 이 조달을 위해 일본은 자국민은 물론 식민지인 조선에 소위 ‘내선일치’(內鮮一致)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을 황국신민화, 즉 일본 황제의 백성으로 삼기 위한 정책을 강행했다. 그리하여 1938년부터 조선 청년들을 일본군으로 징집하여 중국과 동남아 아시아 일대의 전쟁에 보냈고 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죽었다.

김만효의 남편 홍성도도 이를 피할 수 없어 일본군에 입대하여 동남아 지역으로 파견되어 싸우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이 전사통지서가 배달되자 평화롭던 그의 가정은 통곡소리로 뒤덮였다. 그 후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더욱 심해졌고 그녀는 견딜 수 없어 두 딸을 두고 집을 가출, 출가한 언니의 집을 찾아가 몇 달을 지내면서 앞날을 위해 기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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