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반대로 수감, 그리고 해방

김만효는 만주 심양의 언니 집에 얹혀 살면서 언니의 교회에 가서 예배하고 기도했다. 얼마 후,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강사가 성결교회 이성봉 목사였다. 성결교회가 있는 줄 처음 알게된 김만효는 이성봉 목사의 위엄에 찬 바리톤 목소리, 머리와 가슴을 파고드는 말씀, 한없이 영감에 빠져들게 하는 찬송을 통해 큰 은혜를 받았다.

“세상에 저렇게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구나!” 김만효는 시간 시간마다 감탄하며 은혜 받았다. 생전에 울어보지 못한 울음을 회개하느라 처음 울었다. 그것은 설교 중에 “아무리 핍박이 와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부모님 공경하는 것을 포기하면 신자가 아니다”는 강사 목사의 말에 가슴이 뜨끔하며 회개한 것이다.

그는 집회가 끝나자 곧 기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정주읍 시댁으로 돌아왔다. 그는 시부모께 용서를 빈 후, 두 딸을 키우며 시부모께 효성을 다했다. 그리고 시간이 나는 데로 교회에 가서 열심히 소리쳐 기도했다.

“주여, 나도 이성봉 목사님 같이 전도자가 되게 해 주소서.” 기도한 후, 밖에 나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도했다. 그의 전도에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신이 난 그는 더 열심히 전도했다. 1943년 10월이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군수물자의 부족으로 패전을 거듭한 일제는 위기에 몰리자 국민들을 달달 볶았다. 10가구를 한반으로 묶고 애국반장을 시켜 놋이나 철 조각, 피자기름 등을 강제로 헌납케 했고, 아침마다 가구당 1인 이상 신사참배에 동원하여 동방요배와 황국신민선서 등을 복창시켰다. 이에 불복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심문과 고문을 자행했다.

교회의 목사나 장로들이 신사참배에 반대해서 경찰에 체포되어 주일예배도 못 드릴 형편이었다. 주일에 예배를 못 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그녀가 강단에 올라가 성경을 읽고 설교했다. 요지는 옛날 다니엘의 세친구가 우상숭배를 하지 않았다가 체포되어 풀무불 속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보호해 머리털하나 상하지 않았으니, 우리도 신사참배하지 말고 버티면 하나님이 보호해 주실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의 열변에 신자들이 놀라며 은혜 받았다. 그때 신자 속에 숨어있던 형사가 일어나서 그녀를 끌어내려 체포했다.

법정에 선 담임목사와 장로들, 그리고 김만효는 각각 5년 언도를 받았다. 그녀가 소리쳤다. “이 재판은 엉터리재판이다. 우리 예수님이 장차 너희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자 그녀에게 재판장 모독죄를 적용해 10년 언도로 늘어났다. 그녀는 감옥에서도 기가 죽지 않고 큰소리로 찬송을 부르고, 한 방 여자 죄수들에게 전도해서 같이 예배드렸다. 간수들이 조용히 하라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서 끌려가 매를 맞기도 했다.

1945년 8월 마침내 해방이 왔다. 그녀는 8개월 만에 석방되어 집으로 왔지만, 몇 달 후에 몸이 쑤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일본을 심판하고 우리를 해방시킨 분은 하나님이다. 이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래서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 받고 잘 살 수 있다고 전도했다. 그에게는 하나님 외에 누구도 두렵지 않았다.

그는 며칠 후,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서울에 가서 신학교에 들어가 공부해서 전도자가 되어 전도를 마음껏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차에서도 그는 소리 질러 전도했다. 그의 목소리가 쩡쩡 울렸다. 그의 전도소리를 듣고 옆 칸에 탄 이성봉 목사가 찾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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