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그리고 순국

성결교회의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사중복음과 성서적 창조론, 신론은 일본 국체와 맞을 수가 없었다. 특히 재림교리는 일본인이 세계의 심판자로 자처한데 대하여 명예가 손상된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재림의 교리는 일본 천황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이며 일본의 국체를 위반하는 사상이라고 정죄되었다.

김하석 목사는 1939년 10월 6일 신사참배 불응의 죄목으로 순교하였다. 일본당국은 독립운동가였던 그가 복음사역자로, 일본의 집요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성결교회의 신앙의 지조를 끝내 굽히지 않자 그를 죽인 것이다. 김하석 목사는 대구의 보인산에서 일본의 관헌에게 모진 매를 맞았다. 김하석 목사는 체격이 건장하여, 모진 매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자 잔인하고 무지막지한 일본 헌병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두개골을 강타하여 순교의 피를 흘렸고 또한 순국의 피를 흘렸다. 

“목사님은 일본 경찰에 의해 심한 고문을 당하였고 흉기를 든 일본 경찰들이 마구잡이로 때리다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칠 때 쓰러졌고, 끝까지 조국과 하나님을 배신하지 아니하고 불굴의 의지로 순교하셨습니다.”

김 목사가 순교할 당시 함께 고난을 받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증언이다. 김 목사는 성결교회 복음의 사역자로서 집요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다가 고귀한 피를 주의 제단에 바친 순교자다. 또한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서 이 땅에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피를 쏟은 순국열사인 것이다.

김하석 목사의 부인 조영복 사모는 슬하에 3남매를 두었으나 장남 김성철과 막내아들 차남 김원철은 일찍이 별세했다. 그는 노년에 둘째로 태어난 장녀 김성애 권사와 함께 살았다. 김성애 권사의 남편이며 조영복 사모의 사위 전진수 집사는 군산 대야초등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조 사모를 잘 섬겼다.

조영복 사모는 내내 군산의 기장(基長) 교단 교회에 출석하다가 가까운 곳에 군산성결교회가 개척되자 그 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하다가 1988년에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자녀로는 군산성결교회의 김성애 권사가 유일하고, 부산에 김하석 목사의 큰아들인 김성철의 아들과 후손들이 살고 있다.

김성애 권사는 현재 82세로서 노환으로 병이 깊어 장항에 있는 병원에 입원가료 중이다. 김성애 권사는 김하석 목사가 평생을 독립운동가로서 투옥당하고 목회자로서 순교하는 험난한 생활로 점철되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따뜻한 부성애도, 단란한 가정의 행복감도 누린 기억도 없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께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순교하신 사연도 묻혀버린 슬픔과 허탈함이 가슴에 맺혀있음인지 아버지에 대한 말문을 여는데 많은 시간이 흐르곤 한다.

군산성결교회 마당 정면에 있는 목양실의 출입문 곁에 군산교회 성도 일동이 2008년 10월 9일에 세운 김하석 목사의 순교기념비가 서있다. 조그만 돌비 하나 외로이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늦었지만 순교신앙을 되새겨 보게 하는 자그마한 성지로 조성되어 있어 숙연한 자세로 머리를 숙이게 한다. 이 순교기념비가 초대 성결교회의 신앙을 회복하여 오늘에 적용하고 미래의 좌표를 설정하는 거룩한 성지가 되어야 하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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