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목회생활과 통역생활

최석모는 졸업한 후 무교동전도관의 부임 교역자로 임명 받았고, 동시에 성서학원 사감으로 겸임했다. 동양선교회에서는 졸업자에게 첫 임지 발령을 했고 1915년 당시 전도관은 전국에 9개였다. 교회마다 주임교역자와 부임교역자가 있었고, 개척의지가 있는 졸업자는 고향 지역에 개척전도사로 파송하였는데 최석모는 무교동전도관에 부임하게 된 것이다.

당시 무교동전도관의 주임교역자는 이명헌 목사였다. 최석모는 주일에는 무교동전도관에 가서 주임 목사의 일을 거들었고, 새로 믿는 신자들에게 기독교의 교리와 사중복음에 대해 가르쳤으며, 오후에는 신자들을 지휘하여 노방전도를 하는데 앞장서는 등 모범을 보였다. 그는 나팔을 직접 불어 사람들을 모으고 전도설교를 했다.

그는 평소에는 남자 기숙사의 사감으로, 학생들의 생활을 지도하고 상담에 응했다. 매일 새벽마다 새벽기도회를 인도했고, 밤에는 취침하기 전에 모여 간단히 하루생활을 반성하는 기도회를 가져, 신학생들의 경건생활 훈련에 힘썼다. 26세 밖에 안됐기에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신학생들의 생활을 지도하고 감독하는 것이 어려웠지만 그의 인격적인 감화와 경건생활로 나이 많은 학생들이 넘보지 못할 위엄과 권위가 있어 잘 감당했다.

그는 1920년에 일약 동양선교회의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 때 주한 선교사가 10여 명이었고, 그 때까지 이장하 목사가 통역 겸 서기를 겸했으나, 이장하가 불의의 문제로 면직되면서 영어를 잘하는 최석모가 통역 겸 서기로 발탁된 것이다. 초창기 한국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의 선교사들이 주도권을 지니고 운영하고 있었고, 이런 모습은 1940년 일제에 의해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축출 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당시 한국인 교역자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매우 드문 상태에서 최석모의 존재는 선교 사역과 교단 발전에 큰 도움이었다.

1920년 9월에 그는 성서학원의 사감을 사직하고 새로 개척된 독립문전도관의 주임 교역자로 부임하여 목회에 힘썼다. 독립문전도관은 1917년에 독립문 근처 실공장에서 일하던 여공들 중심으로 무교동전도관의 한상호 집사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신자가 많아지자, 무교동전도관의 지교회로 전셋집을 얻어 옮기면서 최석모 전도사를 교역자로 임명한 것이다.

1921년 전도관은 성결교회로 개명되었다. 그는 열심히 목회하였고 1922년에 행촌동에 1백평의 건물을 매입하여 교회로 수리하여 80여 명이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는 1922년 5월에 제2차로 성결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가 자나깨나 교회의 성장에 힘을 쏟았지만, 또 한편 성결교회의 전체적 발전에도 힘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1922년에 목회하면서 성서학원의 사감을 겸임하도록 본부에서 임명을 했을 뿐 아니라, 수시로 그를 찾는 선교사들과 또한 선교사들에게 목회적으로 호소하는 한국교역자들을 대변해서 선교사들을 만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선교사와 성결교회의 가교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교단에 유일한 통역설교자로, 언어의 구사능력과 함께 영력이 겸비된 통역설교로 많은 교역자와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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