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성결의 은혜를 전하라!”

나카다 목사는 영남지방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펼치려 하였으나 매일같이 쏟아지는 폭우로 중단하고 7월 말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전시위문단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일본군을 위해 사역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한국을 순회하면서 “한국에도 성결의 은혜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교자적 각오로 나섰던 것이다. 그는 진정한 성결운동가로 국수주의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옹졸한 일본인은 아니었다.

그의 한국 전도여행은 기차도 자동차도 인력거도 없는 고난의 길이었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장맛비를 흠뻑 맞고 떨어가며 한국의 외진 교회까지 찾아다니다가 달구지와 함께 개천에 굴러 떨어지고, 홍수로 넘치는 강물에 빠져죽을 뻔도 했지만 성결의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그는 한국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뒤인 1913년 ‘조선크리스천의 사명’이란 글을 썼다. “조선은 멀지 않아 동양 민족 가운데 제일 먼저 교화될 것이다. 조선의 크리스천들은 지금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머지않아 일본에도 선교사를 파송할 것이다. 조선 민족은 원래 평화의 백성이다. 평화의 사자,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동양 각국에 역사하게 될 백성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선견지명이 있어서 한국의 미래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긍정적 사고는 한국 순회전도 과정에서 체험한 한국교회의 열정적인 태도와 동경성서학원에서 열정적으로 헌신하는 한국인 전도자들의 모습에서 감동을 받았기에 나온 말이라 생각된다.

나카다가 한국여행 과정에서 한국에 아직 전파되지 않은 성결의 복음을 전하니 한국인들이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느낌을 받았는데 그 첫 번째가 그는 한국인의 흰옷이 매우 깨끗하여 성결인의 모습으로 연상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그 흰옷은 대부분 때에 절어 더러워서 마치 타락한 성결신자를 연상했다. 멀리서 바라볼 때에는 깨끗한 것 같은 데 그 내면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는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존선교사들의 의료선교를 높이 평가했다. 한국은 의료수준이 낮아서 의료선교가 한국인들에게 큰 호감을 사고 있음을 알았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의료혜택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기독교인이 된다면 신앙이 제대로 성숙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가 느낀 또 한 가지는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잘 알고 열심히 사역하지만 토착사역자들이 절대부족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한국에서 선교에 성공하려면 토착사역자들을 양성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에 성경학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전시 일본군 위문을 위해 왔으나 그의 활동의 진짜 목적은 동양선교회의 창설 취지대로 아시아에 성결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그는 1905년 5월부터 7월까지 70여 일 동안 나카다는 한국 여러 지방을 다니며 성결의 복음을 전파했고 그의 노력으로 1907년 5월 30일 무교동(현 서울 종로구)에 첫 성결교회가 시작되기전  한국인은 성결복음을 만날 수 있었다. 이 땅에서 성결의 복음전도자 나카다 목사를 통해 성결복음 전도의 서막이 올랐던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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