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성결교회의 창립

나카다 쥬지 목사는 일본에 돌아온 후 영국에서 만났던 박스턴의 아들 박스턴 B. L 선교사를 통해 사사오, 아마다 등의 좋은 동지를 만나 ‘불의 혀’ 잡지를 발간하면서 성결운동을 전개했다. 그 후 전국을 순회하면서 ‘성령의 세례’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강조하고 신앙의 동지들과 함께 ‘호리네스유니온’(성결의 벗)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카우만 부부와 자주 편지로 연락하면서 “일본에서 성결운동을 하는 전도단체와 무디성서학원과 같은 실제적 전도에 필요한 전도자 양성기관을 만들어보자”는 카우만 부부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1901년 2월 22일 카우만 부부가 일본에 오게 되었고, 나가타 주지와 카우만 부부는 1901년 4월 1일 도쿄 중심지에 중앙복음전도관을 개관했다. 이곳을 성결복음 전파의 근거로 삼아 일본에, 나아가 한국과 중국 등 동아시아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지구상에서 성결교회의 첫 시작이었다. 중앙복음전도관 개관과 동시에 나카다와 카우만 등은 도쿄성서학원의 간판을 함께 내걸고 복음전도자 양성을 위한 학교를 설립, 운영하기 시작했다.

나카다는 낮에는 도쿄성서학원의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복음전도관에서 전도에 온 힘을 쏟아 일했다. 그는 1905년 동양선교회 일본복음전도관의 감독에 취임했다. 이후 나카다는 일본성결교회의 최고공로자로 일본 성결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또한 그는 정빈 김상준 이장하 이명직 이명헌 등 한국성결교회의 1세대 지도자들을 양성한 은사이기도 하다.

나카다 목사가 한국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04년이다. 일본과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주도권 경쟁을 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중국대륙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가지고 한국침략의 속셈을 드러내어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개신교교파들의 연합체인 일본복음동맹회가 한국과 만주의 전쟁터로 위문단을 파송하기로 하고 나카다 쥬지 목사와 혼다 목사를 선정했다.

일본복음동맹회는 나카다와 혼다 선교사가 한국의 여러 교회를 방문하게 된 요지를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다. 한국과 일본은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는 것,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이 한국영토에서 일어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위로한다는 것, 무엇보다 아시아의 개화와 복음전파를 위해서 한일 두 나라의 기독교가 서로 도와야 한다는 요지였다.

나카다 목사 일행은 1904년 5월 11일 도쿄를 출발하여 14일에 고베에서 배를 타고 16일에 부산에 상륙했다. 그는 다시 배로 목포를 거쳐서 인천에 도착하여 5월 18일에 기차로 서울에 들어왔다. 나카다의 방문 목적은 일본군 위문전도에 있었으나, 내심으로 한국 각지의 기독교 신자들을 찾아 위문하고, 복잡한 시대 정세 속에서도 한국교회가 부흥하는 비결을 알고자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에 성결복음을 전하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