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북한교회 재건

박용현 목사는 1945년 10월 신의주 동부성결교회에 부임하여 이성봉 목사와 북한지역교회 재건을 주도했다. 이 목사는 남쪽 지역을, 박 목사는 북쪽 지역을 순회한 결과 38개의 북한지역 교회들이 속속 문을 열었다. 박 목사는 일본헌병대에서 쓰던 진남포교회당을 다시 찾아 성결교회 재건 부흥회를 인도했고 장로교와 감리교 교인들까지 교회당에 가득 모여들었다.

해방 이후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주축으로 자리잡고 이들에 협력하는 기독교세력으로 기독교도연맹에 세워졌다. 당시 기독교연맹을 주도하는 인물로 위원장을 맡은 이가 김일성의 외삼촌 감양욱 목사였다. 그는 박 목사에게 수차례 찾아와 자기와 함께 조국을 건설하자며 평안남도기독교연맹위원장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박 목사는 자기는 세상을 출가한 사람이라며 고사했다. 그는 또한 북한이 11월 4일에 첫 선거를 실시하면서 진남포교회당을 투표소로 지명하자 단호히 거절했다.

진남포교회 신자들은 전투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해방 이후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고 정치적인 문제 또한 신앙생활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조성했다. 당시 신자들은 정치 경제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시대에 장터를 찾아다니며 쌀, 성냥, 콩나물, 초, 기름 등 생활 필수품 장사로 근근이 생활하면서도 주일을 성수하고 헌금을 힘에 넘치게 하며 주안에서 기꺼이 서로 도와주며 살아갔다.

당시 교회 주택의 방이 8개나 되었는데 박 목사는 가족과 함께 방 3개를 썼고 남은 방 5개는 교회의 사역에 사용되었다. 박 목사의 모친 한 권사는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할 것 없이 다니며 우리 목사님의 영력이 충만하여 기도로 미친병도 완쾌시킨다며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는 남은 방에 들여놓고 치유예배를 드려 교회에는 밤낮없이 기도와 찬송이 끊이지 않았다.

1947년 초 어촌마을 사람들이 박 목사를 찾아왔다. 이 마을사람들은 모두 배를 타고 남한으로 가서 살자고 결의했다. 막상 출발하려고 하면 날씨가 나쁘거나 비상이 걸려 차일피일하다가 합심기도회를 하면서 한 달이 넘도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다.

철야기도를 하던 어느 권사가 검은 수염이 길게 내려온 목사님을 모시고 남으로 무사히 넘어간 꿈을 꿨다. 사람들은 수염이 긴 목사님을 모시고 가라는 계시로 알았고 마을 대표들은 꿈을 꾼 권사를 대동하고 찾아와서 남한으로 가야한다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박 목사는 목자가 이 많은 양들을 버리고 나만 살자고 도망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들은 같이 기도한 뒤에 대답을 줘도 좋다면서 돌아가지 않고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었다. 박 목사는 함께 일주일을 기도한 후에 그들을 보내며 다음다음 월요일에 같이 가겠다고 약속했다.

4월 초순 홍역을 잃는 셋째 아이를 데리고 하루 밤과 낮 동안 돛단배로 인천항에 도착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박 목사 일행이 떠난 다음날  저녁에 박 목사를 체포하러 보안서원들이 들이닥쳤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남으로 내려왔고 남한에서의 목회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계속>

저작권자 © 한국성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