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에 함흥교회 장로, 해방 후에 장충단교회 창립

1935년 나이 32세가 된 김순모는 생명보험 신의주 영업사원으로 있으면서 많은 실적을 올렸다. 그는 신의주동부성결교회의 담임 한성과 목사가 자기처럼 본래 천주교 신자였지만, 만주에 공부하러 가서 17살에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한 목사의 중생과 성결에 대한 설교에 놀라며 철저히 회개했다. 장로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지만 처음 듣는 중생과 설교의 말씀에 은혜 받고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성결교회를 가장 이상적인 교회로 생각하고 감사했다.

김순모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주와 선천에까지 진출하여 영업실적을 올려 의주와 선천지부의 지부장을 겸직하는 승진을 했다. 교회를 떠날 수 없는 그는 아내와 아들은 신의주 집에 두고, 의주와 선천을 다니며 활동하며 한 달에 한 번꼴로 집에 올 정도로 바쁘게 일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월말이면 신의주에 돌아와 주일에 교회에 가서 십일조 헌금을 반드시 드렸다. 그는 자기와 아내, 그리고 아들 명은이 이름으로 각각 감사헌금도 드렸다.

1936년 가을에 신의주동부교회에 이성봉 목사가 부임했다. 그는 이성봉 목사의 설교가 너무 좋아 한 달에 한번 가던 교회를 한 달에 두 번 와서 설교에 은혜를 받았다. 이성봉 목사의 설교에 감동을 받은 새 신자들이 물밀듯 몰려들어 교회가 크게 부흥되어 2층 붉은 벽돌교회를 크게 건축할 때 그는 정성을 다해 큰 헌금을 드렸다. 그렇게 신의주에서 제일 큰 교회가 완성되었다.

1940년에 그는 서울 본사의 사령으로 함흥지부장으로 발령이 났다. 함흥은 신의주와 너무 멀어 올 수 없자 그는 가족을 데리고 함흥으로 가서 산수정성결교회를 찾아 교회 곁에 집을 얻었다. 강송수 담임목사의 인격적인 목회에 감동되어 열심히 봉사했고 이듬해 38세 때 장로장립을 받았다. 그는 당시 성결교회 최연소 장로여서 전국에 주목 받았다.

그는 1943년 5월 하순 경, 본사와 업무관계로 서울로 출장을 갔다가 주일을 서울에서 보냈다. 그는 유명한 아현교회에 예배드리러 갔는데, 그날따라 전국성결교회 교직자 체포령이 내려 최석모 담임목사가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가다 기다리고 있던 일본 경찰에 잡혀 끌려갔다. 그래서 어떤 장로가 대신 인도하러 올라가다 다른 일경에 또 끌려갔다. 그것은 성결교회가 재림신앙을 포기하지 않아 내려진 조치라고 했다.

 “나쁜 놈들! 하나님이 너희들을 가만히 놔둘 것 같으냐?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다!” 그는 분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튿날 본사에 가서 혹시나 해서 함흥교회로 장거리 전화를 했다. 사모님이 울면서 “어제 강 목사님이 경찰에 잡혀가셨다”면서 “경찰이 김 장로를 찾고 있으니, 함흥에 오시면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눈앞이 캄캄했다.

며칠 후 조선총독부에서 본사에 “함흥지부장 김순모를 파면하라”고 지시가 내려왔다. 그는 이제 본사에도 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숨어 지내야만 했다. 그는 할 수없이 작은 양복점에 직공으로 숨어 지내며, 함흥 가족생각이 나면 기도밖에 할 일이 없어 열심히 기도했다.

마침내 1945년 광복이 왔다. 그는 기쁨에 벅찼지만, 무엇보다 성결교회 재건에 마음을 쏟았다. 그는 서울신학교에서 열린 해방 감사예배에 참석하여 거기서 만난 유세근 목사와 함께 장충단 일본인성결교회를 접수하는데 힘썼다. 무라가미 일본 목사가 귀국하면서 그들에게 교회를 양도했다. 그래서 그 해 9월에 장충단교회를 창립하고 유세근 목사가 담임목사, 김순모 장로가 첫 시무장로가 되었고, 월남한 함흥 신자들을 장충단교회로 많이 인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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