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로 개종해 한국으로 오다

전영복(田永福) 목사는 한국을 사랑한 일본인 전도자다. 본명은 오다 나리찌(織田楢次)로, 그는 일본의 가혹한 식민지정책으로 신음하는 한국인들의 참상이 안타까워 죄과를 회개하는 심정으로 온갖 고난을 겪으며 진정한 한국인이 되기 위해 ‘전영복’으로 개명하였고 최후 순간까지 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자였다.

오다는 1908년 1월 18일 일본 오사카지방의 가난한 어촌마을에서 9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재산을 털어 절간을 세울 정도로 신심이 깊은 불교도였다. 오다는 부친의 유언대로 절간에 들어가 유명한 스님이 되려고 수련에 전념했으나 회의를 느껴 17세에 승복을 입은 채 절간을 뛰쳐나왔다.

그는 고베 시내를 방황하다가 노방전도대의 뒤를 따라 교회로 들어갔더니 이상하게도 자꾸 눈물이 쏟아지면서 지난날의 잘못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하는데 그때는 기독교의 ‘기’도 모르고 하나님 ‘하’도 모르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했다. 그날 호리우찌 목사의 권유로 세례를 받고 그곳에서 목사의 가르침을 받아 기독교 진리를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 후 호리우찌 목사의 권유로 간사이(關西) 성서학사에 입학했다.

성서학사에서 공부할 때 교회에서 한국유학생 김 씨를 만났는데 그는 오다에게 일본제국의 죄상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내 아버지는 3·1독립만세운동 때 일본헌병에게 총살당했소. 나는 원수를 갚으려고 일본에 와서 공부하고 있소.” 김 씨는 일본침략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사이교의 정한론으로부터, 한일합방, 민비시해사건, 고종독살사건, 관동지진한국인대량학살사건 등에 대해 눈에 핏발을 세우며 하는 이야기를 듣고 무척 충격을 받았다.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교장이 물었다. “오다는 어디로 전도하러 가고 싶은가?” 그는 그때 아프리카 전도전기를 읽으며 크게 감동을 받을 때였다. 오다는 새벽마다 동산에 올라가 기도했다. “하나님, 아프리카 대륙에서 죽어가는 저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저를 보내주세요.”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프리카보다 한국이 있지 않으냐? 한국으로 건너가거라. 너는 이방인을 위한 나의 택한 그릇이다.” 그의 나이 21세였다.

여비를 아껴 화물선으로 고베를 떠나 목포항에 닿았다. 항구에 내리고 보니 수중에 남은 돈이 50전뿐이었다. 배를 타고 오면서 사귄 박 씨가 자기 집으로 가자고 하여 따라갔다. 집에 도착한 후  박씨가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단히 미안합니다. 오늘밤만 주무시고 가주셔야겠습니다. 부모님이 반대합니다.” 광주학생사건으로 중학생인 박 씨의 동생이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는 처지여서 반일감정이 컸기 때문이었다.

오다는 사흘 동안 낯선 목포바닥을 헤매 다니며 길가에서 파는 인절미로 끼니를 때웠다. 무일푼 신세로 사흘 뒤에 닿은 곳이 전남 광주였다. 탈진하여 쓰러지기 직전 멀리 보이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간신히 걸어갔다. 광주일본교회라는 간판을 본 순간 그는 쓰러지고 말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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