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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갖은 고생을 하고 자란 정중흥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가슴앓이가 있었다. 길을 가다가 밥 얻어먹는 거지를 만나면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거지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등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누더기 옷을 걸치고 바가지를 들고 구걸하는 어린아이를 볼 때면 마치 어린 시절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왜 이러는 것일까? 그는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편하게만 사는데, 왜 자신은 거지를 보면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박혀 지워지지 않고 눈을 감으면 더 어른거리는 것일까? 이런 번민으로 힘들어 하던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성경을 읽었다. 눈에 들어온 성경은 시편 68편 5절이었다.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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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공주 대신교회)
2015.01.2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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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아 여학교를 졸업한 정중흥은 낙후된 시골로 다니면서 동네 부녀자들을 모아 놓고 야학을 가르쳤다. 그때 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여자는 드물어서 사회에서 인텔리로 인정받아 도시의 좋은 직장에도 갈 수 있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못 배운 농촌의 부녀자들을 깨우치는데 헌신했다. 학교에서 배운 것을 사회에 실천한 것이다. 특히 그녀처럼 농어촌의 부녀자들을 깨우치는 농학이나 야학을 하는 여자들은 흰 저고리에 검정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얼른 눈에 띄었다. 그녀는 가정에서 여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여자들도 배워야한다고 말하며, 한글도 깨우쳐 주고 성경공부도 하면서 가까운 교회에 다니도록 인도하였다. 그래서 많은 여자들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열심히 배우고 교회도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다.당시는 유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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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공주 대신교회)
2014.12.2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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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흥은 1914년 4월 21일 전북 정읍에서 아버지 정우경 씨와 어머니 김마리아 씨 사이에서 딸 셋 중에 막내딸로 태어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어렸을 때는 근동에서 부자로 살았으나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 셋을 키우기 위하여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고향을 떠나 순창으로 이사를 온 그의 어머니는 딸 셋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고, 궁핍한 살림을 감당하면서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다.그가 7세쯤 되었을 때 한 동네에 살던 친구가 옆 마을에 아주 재미있는 곳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따라 나섰는데 그 곳은 바로 정중흥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집, 순창교회였다.당시만 해도 유교적인 풍습에 의해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전통적 관념이 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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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공주 대신교회)
2014.12.17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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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긔독신보(基督新報)’가 1930년 12월 8일에 창간 15주년을 맞아 논문(30년 후 조선교회)과 소설(종교소설과 성극) 현상모집을 했다. 한도숙의 소설 ‘갱생의 봄’이 1등으로 당선되어 1931년 3월 1일자 신문에 발표되었고 15원의 상금도 획득했다. 한도숙의 소설은 8회에 걸쳐 신문에 연재되었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예배당에서 만난 송상규와 은순이 서로 사랑하여 결혼을 약속하지만 상규의 집안이 결핵으로 몰락해 가는 것을 안 은순의 아버지가 은순을 강제로 영어 교수와 결혼시켰다. 그러나 은순이 결혼한 지 1년도 못돼 남편에게 버림받아 결혼생활은 파탄이 났다. 상규는 은순을 잃고 폐병까지 앓게 되자 외로워 아카시아나무에 목을 매지만, P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나 그의 권면으로 서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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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4.12.1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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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1946년 5월 김기삼 목사와 경남 김해교회에서 시무했다. 1946년 그는 대한민국 초대 상공부 임영신 장관의 비서실장으로 잠시 교회를 떠나 있었고 김기삼 목사는 인천영화중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다. 인천영화중학교는 우리 교단이 운영했던 최초의 미션학교이다. 1948년 4월 제3회 임시총회에서 인수하여 총회가 400만 원을 지원하고 10월 5일에 재단인가를 받았다. 이후로도 총회에서 매년 100만 원을 지원했다. 김기삼 목사는 초대 교장으로 부임해 봉사했으며, 주간 8학급 424명, 야간 3학급 136명 총 560명을 수용했다. 한도숙 전도사는 1950년 6·25전쟁으로 가족과 함께 고향에 내려가 피란 중에도 육군병원을 찾아가 실의에 빠진 부상병들에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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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4.11.12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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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숙 전도사는 이른 새벽에 일본형사들이 김기삼 목사를 검거하러 오자 이미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형사들이 수색하는 동안에 재빠르게 아침밥을 지었다. 한 전도사는 일본 형사에게 의연한 자세로 침착하게 말했다. “아침밥이 다 되었으니 조반을 잡숫고 가시도록 해주시오.” 김 목사는 밥공기에 물을 부어서 물만 마시고 일어섰다. 형사들은 두 뭉치의 책과 담요를 김 목사의 손에 들려주고 최후의 유언이나 하라는 듯이 “집안에 부탁해 둘 말은 없나? 있으면 지금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주저하다가 사모 한 전도사를 향해 “올 것이 왔으니 나는 가오, 주께서 오실 터이니 소망을 가지고 깨끗하게 살도록 힘을 쓰시오.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영희의 병이 웬만큼이라도 회복되거든 속히 고국으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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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4.10.0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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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삼 목사는 유치장 신참이기 때문에 구석진 거름통(변기) 옆에 앉아있게 되었다. 유치장 고참은 철창 앞에 앉아서 첫 번째 들어오는 김 목사의 밥을 가로채 착복한다. 그것이 유치장의 관례라는 것이다. 김 목사는 기도했다. “전쟁은 날로 치열해지는데 주여 우리 가족들과 목자 없는 양 같은 가엾은 신도들을 보호하여 주옵소서. 긴박하여 가는 세태는 주님 오시기를 재촉하나이다. 마라나타 아멘.” 밤이 되면 가혹한 고문취조를 받는 처절한 신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피를 토하고 목숨이 끊어져도 의를 위해 싸우리라”고 주먹을 쥐고 부르짖었다. 49일 동안 어떤 조치도 없이 유치장에 가두었다가 특고실로 데리고 가서 특식을 제공하는 등 우대를 한다. 김 목사에게 초조감과 긴장감을 주어 심리적인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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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4.09.2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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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숙 전도사는 감옥에서 기도하던 중 복음전도에 헌신하겠다는 소명을 받았다. 조선의 독립이 격렬한 저항이나 물리적인 폭력 등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권회복운동의 이상을 신앙으로 승화시켜 민족의 영혼구원이 시급하다는 하나님의 소명을 깨달았다. 한도숙 전도사는 1920년 공주형무소에서 출감하자 곧바로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인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1924년 졸업 후 동양선교회 소속 미국인 에뮬라 블랙 선교사(Miss Emulla Black)와 함께 경상도 지방순회에 나섰다. 한도숙 전도사의 첫 번째 사역으로서 2년간의 순회전도를 마치고 대전성결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한 전도사는 1923년 김기삼 목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김기삼 목사는 경남 동래 출신으로 1919년 3·1만세운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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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4.09.1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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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숙 전도사는 1902년 11월 27일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서 한명수씨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한 전도사가 태어난 시기는 경인선 개통,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창립,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등 격변의 시기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엄격한 유교 가정에서 한문을 배웠고 유교전통의 미덕이라고 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배우면서 성장했다. 삼종지도는 칠거지악(七去之惡)과 더불어 봉건사회의 남녀 불평등 가운데 가장 말썽이 되어온 것이다. 삼종지도는 여자가 시집가기 전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야 하고 시집을 가게 되면 남편의 의사와 처리에 순종해야 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 전도사가 9세가 되던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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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4.09.03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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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행 목사는 6명 모이는 대사리교회에 부임하여 열심히 전도해서 150명까지 부흥시켰다. 그 기세로 교회 건축까지 마치고 나니 신자들이 배척했다. 마침 전에 그가 시무한 안동교회에서 또 청빙을 하자 곧 대사리교회를 떠나 안동교회에서 3년간 일하다가 성동교회로 부임했다. 이 교회는 10년 된 교회인데, 이상하게 1년에 한 번꼴로 교역자를 바꾸니 교회가 성장할 턱이 없어 겨우 10명이 예배드렸다. 전도의 특기가 있는 그는 열심히 전도해서 80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시키고 시무 7년째인 1980년에 만 70세가 되어 이 교회에서 정년은퇴했다. 그의 목회경력을 보면 특이했다. 보통 교역자가 한 교회에 두 번 시무하기가 어려운데 그는 목회지 13개 교회 중 2번씩 시무한 교회가 3개 교회나 되었고 또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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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본지 전 편집위원장)
2014.08.2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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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행 목사는 성미가 곧아서 신자들이 싫어하면 곧 교회를 떠났다. 아무리 어려운 교회라도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면 하나님이 교회를 부흥시켜 주신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가 1950년 6·25 전쟁 전 김천에서 1년간 시무하면서 장년 30명쯤 모였을 때 갑자기 영천 하양교회라는 조그만 교회에서 어떤 집사가 찾아와 자기 교회로 부임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니까 자꾸 목자 없는 양같이 그곳 신자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어 ‘이 교회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교회에 사표를 내고 영천으로 갔다. 6·25가 일어나기 3개월 전이었다. 김천에 있었다면 공산당에게 시달렸을 텐데 몇 개월 전에 옮겨 공산당은 구경도 못했다. 그를 하나님이 미리 피란시켜 주신 줄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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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본지 전 편집위원장)
2014.08.12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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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젊은 사람들을 군인과 징용으로 강제로 징발했다. 당시 33살인 황신행 목사도 징용으로 끌려가 비행기 공장에서 일했다. 이때 모든 한인들에게 창씨개명(創氏改名)하라고 명령했다. 즉 한국식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그가 예수를 믿고 보니, 평소 이름에 불만이 있었는데, 이 기회에 신앙적 이름으로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어 곧 ‘믿음으로 살자’는 뜻으로 믿을 신(信), 행할 행(行)자로 바꿨다. 이때부터 그는 황신행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또 해방이 된 후 새 이름을 등록할 때도 황신행으로 신고했으며 그 이름대로 살기 위해 기도도 많이 하고 노력을 했다.그는 해방되기 직전에 귀국했다. 전쟁말기가 되자 일본에는 연합군의 잦은 폭격과 지진이 계속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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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본지 전 편집위원장)
2014.07.16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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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삶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강의록을 공부하는,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몇 년 만에 중학 강의록을 마친 그는 내친김에 와세다대학 강의록에 등록하여 공부하면서 나중에는 꼭 와세다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밤이면 책을 읽었다.그는 우연히 ‘우주 제일의 책’이란 제목의 책을 사서 읽다가 그만 감동을 받았다. 그 책은 당시 일본 구세군 대장 산실군평(山室君平)이 쓴 책인데,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큰 경륜이 성경 속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전도용 책이었다. 그때까지 그는 무신론자였지만 이 책을 읽고부터는 문득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찾아갔다. 그 교회가 애지현에 있는 풍교성결교회(담임 정희섭 전도사)였다. 그의 나이 26세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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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본지 전 편집위원장)
2014.07.0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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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신행의 성장과 일본행 황신행의 본명은 황기오(黃五)다. 그는 1909년 8월 13일(음) 경북 청송군 부남면 홍은리에서 농부로 사는 부친 황우석 씨와 모친 권분이 씨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는 조선왕조 말기여서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의 조정을 위협하고 좌지우지하던 때였다. 이듬해 8월에는 강제로 한일병합을 당해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조선민족의 대개는 나라를 잃은 망국의 슬픔에 젖어 삶의 의욕을 잃고 술로 세월을 보냈고, 이를 극복하려는 자들은 독립운동으로써 일본군에 저항하는 의병이 되어 싸웠다. 또는 힘과 실력을 기르기 위해 해외로 유학을 가거나 조선 민중을 깨우치기 위해 마을마다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치고 국사를 가르쳐 민족의 혼을 보전하기도 했다. 황기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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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본지 전 편집위원장)
2014.07.0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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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신복성 장로에게 선진농업을 지도받은 덕에 후포리나 대신면은 지금까지도 인근 지역보다 농업기술이 앞섰다. 근래에 대신농협의 오이가 가락시장에서 인기 농산품으로 인정받을 만큼 발전한 것도 신 장로의 신농업 계몽과 기술지도 덕이라고 생각한다. 전국적으로 여주의 고구마는 쌀과 함께 유명한데, 이것도 고구마할아버지 신복성 장로의 잘살기운동의 열매였다. 여주군 대신면 한강유역 낙화생(땅콩)의 품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한때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다. 이런 엄청난 결과는 그가 풍양동마을을 개척 설립하고 난민과 함께 갯벌을 일궈 농사를 지은 게 시작이었다. 요즘에는 고구마를 생산한다. 신 장로가 초대 장로로 평생 섬긴 후포교회는 초기에는 경기도에서 몇 번째 가는 교세를 자랑했다. 지금도 여주서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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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4.06.25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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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화(仁化)를 평생 좌우명으로 산 신복성 장로의 폭넓은 교제로 그의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 돕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신앙으로 다져진 그는 태산 같은 난관에도 요동이 없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새벽기도는 하늘로부터 믿음과 지혜, 용기와 힘을 충전받는 원천이었다. 그의 삶과 사역은 곧 그의 신앙이었다. 그는 도량(度量)이 큰 반면 생활은 검소했다. 서울을 가려면 지평 기차역까지 사오십 리를 걸었고, 땅을 더 매입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제대한 아들에게 한동안 제대복을 입게 했다. 그가 벌여 놓은 일로 자신과 가정을 챙길 틈이 없었으나 남에게는 후했다. 난민 수십 명을 먹여 살릴 때 차남을 낳았는데 집에는 쌀이 없을 정도로 자신과 가족에겐 인색했다. 그리고 그는 근면했다. 일생 동안 소처럼 밭을 갈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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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4.06.11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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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성 장로는 개척자요 일을 벌이는 대가로, 이번에는 광복 후 월남한 피란민 돕기에 뛰어들었다. 미군의 구호물자 지원을 바탕으로 피란민 수십 명이 신 장로 댁에 동거했으나 역시 역부족이어서 난민들과 함께 며칠씩 지새우며 군청에 생계 지원을 간청하여 마침내 양회벌판(대신면 한강 유역의 불모지 갈대밭)을 얻어 군용 천막을 치고 난민들을 이사시켰다. 그리고 그곳을 개간하여 고구마, 밀, 보리, 호밀 등을 심고 흙벽돌로 작으나마 30채의 집을 지었다. 지금의 대신면 당산리 171번지에 풍양동(豊壤洞)마을이 이렇게 개척된 것이다. 신 장로는 생전에 이 일을 회상하며 감격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또 서울 천호동에 한 과수원을 경작하면서 부화장을 세워 병아리를 생산했는데 여기에다 풍양동마을을 설립한 경험을 바탕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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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4.05.28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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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치하 당시 농촌은 2끼 끼니를 챙기는 것도 어렵던 시절이어서, 신복성 장로는 가장 먼저 ‘농촌 잘 살기운동’을 시작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여서 그는 후포리에 고구마를 보급하기로 했다. 그는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원에 가서 고구마 재배법을 배운 후, 온상에서 싹을 틔워 주민들에게 보급하며 농민들에게 기술 지도를 했다. 그래서 대신면을 중심으로 여주·양평·이천군 일대에 고구마 농사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는 허기진 배를 고구마로 때웠고, 고구마를 판매한 돈으로 땅을 샀다. 당시 1000평에 고구마를 심으면 땅 1000평을 샀다고 할 정도로 고구마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고구마할아버지’였다. 고구마 온상 흙벽에 볏짚을 엮어 댐으로 무너지지도 않고 보온도 했는데, 이것은 신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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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4.04.30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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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성(辛福成) 장로는 38세에 장로로 장립받을 만큼 신실한 교회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종이었다. 또한 천성적으로 의협심(義俠心)이 뛰어나 가난한 자의 아버지로, 무지한 농민의 스승과 선구자로 불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다. 그가 한 일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는 농촌계몽자립운동이고, 다음은 학교설립이다. 그리고 피란민 구호 및 정착촌 설립과 하나님 앞에 신실한 신앙생활 등이다. 출생과 성장 신복성은 1912년 2월 7일, 옛날부터 쌀과 도자기로 유명한 경기도 여주,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농촌, 강천면 강천리 갯골마을(현 가야2리)에서 가난한 농민 신재갑 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19세에 여주군 대신면 옥천면(옥터거리) 임씨 집안의 무남독녀 16세 규수 임은식과 결혼하였다.신복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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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수 목사(상개중앙교회)
2014.04.2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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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강경성결교회에 다니는 윤판석은 백신영 전도사에게 신앙심과 민족교육을 받았다. 그가 1924년 강경보통학교 5학년 때 일제는 조선역사를 폐지하고 일본역사를 가르치게 되자 윤판석이 단장으로 있는 성애소년단원 중 반우 8명이 똘똘 뭉쳐 수업을 거부하고 모두 뛰쳐나와 자퇴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강경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경성애소년단사건이다. 윤판석은 이후 보통학교 때 함께 수업거부운동을 벌였던 김수련의 제안으로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고 구국의용군 제3로반 담당책임자로 일하며 주로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을 했는데 이때 큰 힘이 된 사람이 백신영 전도사였다. 백신영 전도사는 1927년에 강원도 강릉성결교회에 파송되어 전도, 교육, 각 교회 부인회 조직 등으로 크게 역사했다. 1927년부터 서울체부동교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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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 주필)
2014.04.09 1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