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부인회의 재건과 확장운동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1946년 5월 김기삼 목사와 경남 김해교회에서 시무했다. 1946년 그는 대한민국 초대 상공부 임영신 장관의 비서실장으로 잠시 교회를 떠나 있었고 김기삼 목사는 인천영화중학교 교장으로 봉사했다.

인천영화중학교는 우리 교단이 운영했던 최초의 미션학교이다. 1948년 4월 제3회 임시총회에서 인수하여 총회가 400만 원을 지원하고 10월 5일에 재단인가를 받았다.

이후로도 총회에서 매년 100만 원을 지원했다. 김기삼 목사는 초대 교장으로 부임해 봉사했으며, 주간 8학급 424명, 야간 3학급 136명 총 560명을 수용했다.

한도숙 전도사는 1950년 6·25전쟁으로 가족과 함께 고향에 내려가 피란 중에도 육군병원을 찾아가 실의에 빠진 부상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위로와 소망을 주었다.

1952년 부산에서 교단총회와 동시에 열린 신생부인회전국연합회총회에서 6·25전쟁으로 상처입고 침체된 신생부인회의 재흥과 미조직교회의 조직을 위해 한도숙 전도사를 순회전도사로 선정했다.

한 전도사는 박영애 전도사와 함께 1953년 대구에서 열린 부인회전국연합회 정기총회에서 ‘기쁜 소식’의 속간위원으로 선정되어 속간을 주도했다.

‘기쁜 소식’은 1934년 9월에 부인회전국연합회가 창립된 후 11월부터 부인회전국연합회 기관지로 창간된 잡지다. ‘기쁜 소식’의 독자는 일반 부인들이었다.

구독자를 1700명까지 확보하면서 발전하여 오던 중 일본의 말살정책에 따라 1942년 12월에 다른 많은 잡지와 함께 폐간되었다.

이후 속간추진위원인 박영애 전도사와 한도숙 전도사의 노력으로 1954년 7월 20일 ‘기쁜 소식’은 책명을 ‘새 생명’으로 바꿔 속간되었다. ‘부인연합회’도 ‘신생부인회연합회로’ 명칭을 바꿨다.

한 전도사는 막중한 사명감을 품고 전국 교회를 순방하며 집회를 인도하고 침체된 부인회의 재흥을 위해 힘썼다.

특히 미조직교회의 부인회조직, 성미 장려, 전도, 봉사활동 등 폭넓게 활약했다. 그리고 순회 결과를 신생부인회 기관지 ‘새 생명’에 실어 전국 교회에 알렸다.

전국 교회 순회 당시는 6·25 직후여서 공산당에게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혼란의 시기였다. 한도숙 전도사는 공산당에게 남편과 자식을 잃고 슬픔에 잠긴 부인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과 소망과 용기를 북돋아줬다. 그는 순회활동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그 소회를 토로했다.

“나는 일생을 남선북마(南船北馬)로 쉴 사이 없이 바쁘게 다니며 기차를 탈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게 된다. 내 여행길에 사고 없도록, 나 없는 동안 집안이 평안하도록, 내가 가는 교회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도록 기도를 올리고 나면 내 마음은 평안해진다.”

사실 한 전도사는 목회자의 아내로서, 6남매의 어머니로서 어찌 집안일이 걱정이 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그는 한 가정의 주부 역할로만 머물 수는 없었다. 그에게는 복음 전하는 일과 신생부인회의 재건, 확장이 무엇보다 시급했던 것이다.

그는 1952년부터 1956년까지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도와 신생부인회의 재흥, 조직, 확장에 힘썼다. 특히 농촌과 섬 교회를 찾아가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가파른 산과 언덕을 넘어야 했고 험난한 돌밭 길을 걷고 나면 발이 부르트기 일쑤였고  비가 온 뒤에는 논밭 길이 진흙투성이로 발이 푹푹 빠져서 신발을 벗고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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