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 구호사업 - 풍양동마을·천호동개척단 설립

신복성 장로는 개척자요 일을 벌이는 대가로, 이번에는 광복 후 월남한 피란민 돕기에 뛰어들었다. 미군의 구호물자 지원을 바탕으로 피란민 수십 명이 신 장로 댁에 동거했으나 역시 역부족이어서 난민들과 함께 며칠씩 지새우며 군청에 생계 지원을 간청하여 마침내 양회벌판(대신면 한강 유역의 불모지 갈대밭)을 얻어 군용 천막을 치고 난민들을 이사시켰다.

그리고 그곳을 개간하여 고구마, 밀, 보리, 호밀 등을 심고 흙벽돌로 작으나마 30채의 집을 지었다. 지금의 대신면 당산리 171번지에 풍양동(豊壤洞)마을이 이렇게 개척된 것이다. 신 장로는 생전에 이 일을 회상하며 감격의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또 서울 천호동에 한 과수원을 경작하면서 부화장을 세워 병아리를 생산했는데 여기에다 풍양동마을을 설립한 경험을 바탕으로 탈북자난민촌(천호동개척단)을 설립하여 60여 가구나 되는 난민을 구호하기도 했다.

중단 없는 봉사활동 
그는 1974년 영농후계자를 위한 ‘농촌자립연수원’을 설립하여 30~40명씩 2년간 공동체생활을 하며 교육했다. 1973년 교단 제2대 농어촌부장을 지냈으며 전국 교회와 군부대 등 사회기관에 초청받아 농촌 잘 살기운동, 생활정신계몽, 신앙강연 등을 했다.

최동규 대포리교회 원로목사는 “신 장로는 총회 농어촌부와 농촌·교육사업을 우리교단에 정착시키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셨다”라고 말했으며 고 임용희 은평교회 원로장로는 생전에 “신 장로는 전국장로회와 본 교단 총회석상에서도 가끔 농촌교회부흥을 위해 강연하셨고 농촌운동으로 사회와 교인, 장로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친 분”이라고 기렸다.

신복성 장로는 늘 남에게 도움이 될 일을 생각하고 시도했다. 후춧가루를 수입하지 말아야 한다며 후추나무를 재배하기도 하고 간질에 특효약을 제조하여 보급하기도 했는데 경희대 한의대에서 관심을 갖고 상담을 청하기도 했으나 이를 상품화하지는 못했다.

그의 농촌운동 평가
신 장로의 빈민구제·농촌운동은 현대말로 ‘새마을운동’인데, 실은 이보다 더 큰 희생이 따르는 일이었다. 신 장로는 그 한복판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던졌다. 정현순 후포교회 원로장로의 증언이다. “신복성 장로는 평생을 민중과 사회를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한 분이다. 당시 후포리는 교회, 동네, 학교가 하나였으며 그 중심에 교회가 있었다. 이게 신 장로님 신앙운동의 핵이었다.”

신복성 장로는 지역의 지도자이며 학교 이사장이고, 임세흥 장로는 교장이며 한의사로서 지역의 신생 유지였다. 두 분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따라서 후포리와 교회는 이상적 농촌마을, 모범적 농촌교회였다. 임동혁 성산교회 원로목사의 증언이다.

“당시 후포리교회와 대신중고등학교는 덴마크의 기독교농촌사회운동가 그룬트비의 생활향상교육운동과 조국·민족애정신교육, 농촌부흥운동의 정신을 연구하여 교육하며, 농촌발전에 학생들이 개척자로 나설 것을 강조하고 구체적인 실천계획을 세워 학생들과 교인들 가정에서부터 모범적 농촌의 발전상을 보였다.” 
농촌교회 운동가인 최동규 이천 대포리교회 원로목사는 “1960~70년대까지도 후포리와 대신학원은 농촌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영농학습지로 알려졌고 여주지역의 관광코스로 영능을 거쳐 신륵사 등을 포함한 관광코스로 소개되었다”고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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