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전도 사역자

한도숙 전도사는 감옥에서 기도하던 중 복음전도에 헌신하겠다는 소명을 받았다. 조선의 독립이 격렬한 저항이나 물리적인 폭력 등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권회복운동의 이상을 신앙으로 승화시켜 민족의 영혼구원이 시급하다는 하나님의 소명을 깨달았다. 한도숙 전도사는 1920년 공주형무소에서 출감하자 곧바로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인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다.

1924년 졸업 후 동양선교회 소속 미국인 에뮬라 블랙 선교사(Miss Emulla Black)와 함께 경상도 지방순회에 나섰다. 한도숙 전도사의 첫 번째 사역으로서 2년간의 순회전도를 마치고 대전성결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한 전도사는 1923년 김기삼 목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김기삼 목사는 경남 동래 출신으로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돼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김 목사는 1937년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하고 1939년 목사안수를 받고 ‘활천’ 집필인으로 선정되어 이명직 주필을 보필하고 성결교회복음주의 신학으로의 변증에 관련한 많은 논설을 발표했다.

활천에 ‘순복음주의 신앙의 본질’이란 논설을 연재하여 성결교회가 순복음주의임을 강조하고 가톨릭과 자유주의 신학을 아울러 비판함으로써 그의 신학적 태도를 분명히 했다.

1941년 일본 오사카 이마사도(今里) 교회에 부임하여 목회하던 중 1942년 2월 재림 교리 때문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4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그 옥고의 체험을 토대로 ‘주님 오실 때(부제 말안아다)’라는 종교소설을 발표하여 성결문학인의 반열에 올랐다.

1961년 교단이 분열되자 분열을 조종한 ICCC의 매킨타이어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잘못된 신앙사상을 명쾌한 문장으로 공박하여 예성 지도자들에게 성결교회신학의 좌표를 보였다.

평생토록 신학적 논설과 글을 활천에 게재하여 교단의 개혁을 부르짖었고 이명직 목사를 존경하면서도 그를 비판한 글을 죽은 후 발표하도록 남겨, 성결교회를 신학적으로 성숙시키는 역할을 했다.

1928년 한도숙 전도사는 동양선교회 소속 영국인 테이트 선교사(Miss Ida Tate)와 함께 제2차 지방순회 길에 올라 8년 동안 활동하다가 1941년 부군 김기삼 목사와 함께 일본 오사카 이마사도교회에 부임했다.

 1942년 2월 18일 이른 새벽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오사카시 이마사도교회 담임 김기삼 목사를 오사카 경찰 형사들이 덮쳤다. 예배당과 목사관은 그들의 진흙 발에 짓밟혀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 목사가 평소 귀중하게 여기던 수십 권의 책과 설교노트를 압수당했다.

1941년 이미 김 목사가 속해 있는 일본의 홀리네스교회가 일본국체에 반역되는 재림 교리를 선포했다는 죄목으로 60여명의 교역자가 검거되었다. 그리고 300여 개의 교회와 2만 5000여 명의 성도들을 해산시키기로 결정해놓고 있었다. 김 목사의 검거는 2차에 해당된다.

김 목사는 병중에 있는 딸에게 아버지로서 목사로서의 신앙적인 위로를 주었다. 그리고 아내 한 전도사가 지어준 조반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책 뭉치와 담요를 들고 국가치안유지법위반이란 죄목으로 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되었다. 그는 이때가 오리라 미리 각오하고 신도 200여 명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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