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만세를 이끈 삼숙(三淑) 소녀

한도숙 전도사는 1902년 11월 27일 충청남도 천안시 입장면 양대리에서 한명수씨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한 전도사가 태어난 시기는 경인선 개통,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창립,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등 격변의 시기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엄격한 유교 가정에서 한문을 배웠고 유교전통의 미덕이라고 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배우면서 성장했다. 삼종지도는 칠거지악(七去之惡)과 더불어 봉건사회의 남녀 불평등 가운데 가장 말썽이 되어온 것이다.

삼종지도는 여자가 시집가기 전 집에 있을 때는 아버지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야 하고 시집을 가게 되면 남편의 의사와 처리에 순종해야 하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 전도사가 9세가 되던 1910년 어느 날, 오랫동안 유교사상에 깊이 젖어 있던 이 가정에 일대변혁이 일어났다. 기독교를 심히 반대하던 조부가 전도 받아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도숙은 조부와 모친을 따라 교회에 나갔고 이로부터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도숙이 11세 되던 해에 그가 출석하는 천안감리교회 신흥식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이 교회에서 설립한 광명학교에 입학하여 초등교육을 받았다.

당시는 교회가 있는 곳마다 사립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선교사들은 선교부별로 남녀 미션스쿨을 설립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당시 기독교학교는 애국애족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일본은 군사력으로 1910년 한일병합을 이루었다. 도숙은 기독교계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지식이 쌓이고 신앙심이 깊어졌으며 애국애족심도 갖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에는 거족적인 독립선언 민족운동이 일어났다. 이 3·1운동으로 일제의 한국지배가 부당하다는 한민족의 일치된 의사가 표현되었고 민족주체성을 보다 공고히 했으며 근대적 민족의식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세계는 한민족의 역사적 유구함과 민족적 가능성을 깨닫게 되고 일제의 비인도적 무력통치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운동 직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9년 2월 하순 광명소학교의 임영신 선생이 함태영으로부터 3·1독립선언문을 받아 독립운동단체인 전주기전여학교의 결사대원을 만나러 가면서 천안 양대리 마을에 들렀다.

함태영은 목사, 독립운동가, 정치가, 법사로서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을 지냈다. 임영신 선생은 이곳에 와서 평소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던 서용란의 집에 가서 그의 남편 이 선생에게 선언문 등사를 부탁했다.

서용란은 후에 서울중앙성결교회 권사이며 고려대학교 교수였던 고 이문영 장로의 모친이다. 서용란의 남편 이 선생은 ‘어느 날, 어느 시에, 어느 장소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글을 손수 써서 서용란과 함께 밤을 새워 등사했다. 이리하여 임영신의 지도아래 3·1독립만세를 부를 만반의 준비를 했다.  

1919년 3월 1일 한도숙은 동료 민원숙, 황현숙과 함께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에게 끌려가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이들 세 처녀는 갖은 박해와 고문을 당하다가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때 한도숙은 옥중에서 유관순을 만났고 그 밖에 10여 명의 애국여성 동지들과 함께 심한 고초를 당했다. 이로써 천안만세사건에 가담한 황현숙, 민원숙, 한도숙은 독립만세를 이끈 충청도 삼숙(三淑)으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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