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신행의 성장과 일본행  
황신행의 본명은 황기오(黃五)다. 그는 1909년 8월 13일(음) 경북 청송군 부남면 홍은리에서 농부로 사는 부친 황우석 씨와 모친 권분이 씨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는 조선왕조 말기여서 일본이 무력으로 조선의 조정을 위협하고 좌지우지하던 때였다. 이듬해 8월에는 강제로 한일병합을 당해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조선민족의 대개는 나라를 잃은 망국의 슬픔에 젖어 삶의 의욕을 잃고 술로 세월을 보냈고, 이를 극복하려는 자들은 독립운동으로써 일본군에 저항하는 의병이 되어 싸웠다. 또는 힘과 실력을 기르기 위해 해외로 유학을 가거나 조선 민중을 깨우치기 위해 마을마다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치고 국사를 가르쳐 민족의 혼을 보전하기도 했다. 

황기오가 사는 마을에는 소학교가 없었는데 뜻 있는 마을 어른들이 야학을 열어 그는 10세 때부터 야학에 가서 한글을 깨쳤다. 그러나 그가 7세 때 어머니를 병으로 잃어 슬픔에 젖었는데, 2년 후에 부친이 계모를 맞아 딸을 둘이나 낳았지만 전처 자식들을 차별하지 않고 친어머니처럼 똑같이 사랑해 주어서 그는 친모인 줄 알고 잘 자랄 수 있었다.

그는 마을 야학에 열심히 다녀 야학과정(한글, 한문, 산수, 도덕, 역사)을 3년 만에 마친 후 아버지의 농사일을 도왔다. 더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60리 밖 읍에 있는 고등보통학교(중학과정)에 많은 돈을 주고 다니기에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말았다.

그가 18세가 되자 몸이 커지고 점점 배짱이 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사나이 대장부가 시골 구석에서 농사로 평생을 썩는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부친 앞으로 일본에 사는 친척이 편지를 보냈다. 그는 부친이 편지를 다 읽은 후 방에 두고 나가자, 그 편지를 읽고 일본이 조선보다 더 발달된 세상인 줄 알게 되었다.

“그래, 내가 갈 곳은 일본이다.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자.” 이때부터 그는 일본에 가는 꿈에 사로잡혔다. 완고한 부친에게 허락을 받기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조금씩 푼돈을 모아 여비를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지 2년 만에 여비에 쓸 만큼 돈이 모이자 부친과 담판을 하기로 결심했다.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가출을 해서라도 일본에 갈 결심을 했다.

 하루는 그가 저녁식사를 한 후 부친의 방으로 찾아갔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아버지, 일본 애지현 풍교에 친척이 살지요? 저를 그곳에 보내주세요.” “뭐라고? 네가 일본에 가겠다고?” “예. 사내 대장부가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사는 것보다 일본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네가 정신이 있는 놈이냐? 읍내 고등보통학교도 어려운 형편인데, 일본 공부를 어떻게 보내겠나? 어림도 없다.” “제 몸이 튼튼하니까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할 자신이 있습니다. 고학하겠습니다.” “뭐, 고학?”

처음엔 안 된다고 하시던 아버지가 마침내 그의 간청을 허락했다. 그의 나이 20세 때 여비만 가지고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그는 일본 애지현 풍교시의 친척 집에 기거하면서, 낮에는 제사(실)공장에 취직하여 일하고 밤에는 중학교 강의록을 집에서 받아 공부했다.

실공장에는 여자들이 많고 몇 명 안 되는 남자들은 좀 힘든 일을 했지만 어려서부터 농사로 단련된 몸이라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는 일어로 일상의 대화는 가능하고 또 어려서부터 일어 기초를 고향 마을 야학에서 배웠기 때문에 공부가 재미있었고, 지식도 날로 성장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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