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삼 목사의 옥중생활

김기삼 목사는 유치장 신참이기 때문에 구석진 거름통(변기) 옆에 앉아있게 되었다. 유치장 고참은 철창 앞에 앉아서 첫 번째 들어오는 김 목사의 밥을 가로채 착복한다. 그것이 유치장의 관례라는 것이다.

김 목사는 기도했다. “전쟁은 날로 치열해지는데 주여 우리 가족들과 목자 없는 양 같은 가엾은 신도들을 보호하여 주옵소서. 긴박하여 가는 세태는 주님 오시기를 재촉하나이다. 마라나타 아멘.”

밤이 되면 가혹한 고문취조를 받는 처절한 신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피를 토하고 목숨이 끊어져도 의를 위해 싸우리라”고 주먹을 쥐고 부르짖었다.

49일 동안 어떤 조치도 없이 유치장에 가두었다가 특고실로 데리고 가서 특식을 제공하는 등 우대를 한다. 김 목사에게 초조감과 긴장감을 주어 심리적인 위협을 가하고 난 뒤 그를 회유하려는 고도의 심리전을 펴는 것이었다.

그해 6월 김 목사가 특고실로 불려 갔다. 검사가 삭발을 시키고 목사가 중이 되었다고 조소를 하면서 자서전을 쓰라고 연필과 인찰지(얇은 양면괘지)를 준다.

5일간에 걸쳐 자서전을 썼는데 3·1운동 때 출판법 위반으로 1년 반 투옥된 사실을 빼놓은 것이 불안했다. 부질없이 사상적인 의심을 받을까 하여 고의로 빼버린 것이었다.

이튿날 살기등등한 형사 취조관들이 닦달을 한다. 격검 봉으로 등을 콱 밀어 꺼꾸러뜨리더니 머리, 어깨, 허리, 다리 할 것 없이 마구 친다. 그리고 두 형사가 마주 서서 전신을 난타한다. “이놈아, 바른 대로 말하라”는 형사의 소리가 모기소리만큼 작게 들린다. 김 목사는 실신하여 사지를 쭉 뻗었다.

이튿날 다시 취조실로 끌려갔다. 굵은 알이 박힌 주판 위에 무릎을 꿇어앉히고 머리에는 무거운 바둑판을 이었다. 참새와 같이 여윈 다리뼈가 으스러지듯이 아팠다. 시미스 형사가 가죽 채찍으로 온몸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이 무지한 놈들아, 내가 무엇을 하였기에 이렇게 때리느냐 말이다. 의는 나라를 흥하게 하고 죄는 백성을 부끄럽게 한다고 하는데 너희가 이렇게 불의한 행동을 하고 나라가 망하지 아니할 줄 아느냐?”
이것은 김 목사의 최후의 절규이며 반발이었다.

사흘 후 또 다시 취조실로 끌려갔다. “이 신분증이 기억나는가”라며 신분증 한 장을 내민다. 18년 전 김 목사가 동아일보사에 적을 둔 적이 있었다. 그때 동아일보사 주최로 수재민에게 구호금을 나눠 줄 때 사용하던 무임승차권이었다.

자서전에 그 경력을 뺐다는 것과 동아일보는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신문이고 기자는 불량선인들이라고 하며, 억압적으로 열변을 토한다. 또한 교회에서 학도지원병을 도피하도록 조종했다고 추궁한다. 김 목사는 대담하게 말했다.

“학도지원병은 실상 강제징병인 까닭에 그들이 도피한 것은 그들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지 나의 조종으로 한 것이 아니오. 나는 조선독립이 폭력적 정치혁명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조선 독립운동의 이상과 주의를 종교적 신앙으로 대치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한 순정을 기독교천국운동에 정열을 기울여 바쳐 왔던 것이오.”

취조관들을 압도하는 답변이었다. 1942년 4월 28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선고되어 4월 30일 구치감에서 1년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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