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계몽에 앞장 선 ‘고구마할아버지’
일제치하 당시 농촌은 2끼 끼니를 챙기는 것도 어렵던 시절이어서, 신복성 장로는 가장 먼저 ‘농촌 잘 살기운동’을 시작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여서 그는 후포리에 고구마를 보급하기로 했다. 그는 수원에 있는 농촌진흥원에 가서 고구마 재배법을 배운 후, 온상에서 싹을 틔워 주민들에게 보급하며 농민들에게 기술 지도를 했다.
그래서 대신면을 중심으로 여주·양평·이천군 일대에 고구마 농사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그는 허기진 배를 고구마로 때웠고, 고구마를 판매한 돈으로 땅을 샀다. 당시 1000평에 고구마를 심으면 땅 1000평을 샀다고 할 정도로 고구마의 인기가 대단했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고구마할아버지’였다. 고구마 온상 흙벽에 볏짚을 엮어 댐으로 무너지지도 않고 보온도 했는데, 이것은 신복성 장로가 창안한 것이다.
후에 후포리 주민 신갑진 씨가 가나안농군학교에 갔을 때 송판과 대나무를 온상 벽에 대는 김용기 장로에게 신복성 장로에게 배운 방법을 선보이니 어디서 배웠느냐며, 신 장로를 칭찬했다고 한다. 김용기·신복성 장로는 서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당시 존경 받는 농촌운동가로 널리 알려졌다.
고구마 보급으로 인근 마을의 가난퇴치에 일단 성공하고 자신도 경제력을 확보하면서 신복성 장로는 농촌지도자로 부상하였고, 이에 영농대가로 점점 발전하게 된다. 그는 오이농사, 양돈, 양계, 양봉을 했고, 후포리 과수원 3만 평, 천호동 과수원 만 평…. 특히 천호동과 후포리에 부화장을 세워 직접 병아리를 생산·보급하며 양계 기술지도를 했다. 벼농사만 하면 굶어죽는다고 외치며 당신의 집이나 농장은 온통 농민계몽구호로 가득했다.
그는 본격적인 농민계몽과 영농기술지도를 위해 사단법인 ‘계림원’을 설립했다. 매년 봄·가을로 농업에 관심 있는 자들을 초대하여 열흘 정도의 교육을 시켰는데, 숙식을 무료로 하고 강사는 서울대 농업대 교수나 선진농업가들에게 맡겼더니 한 번에 보통 100여 명씩 모였다.
그 때의 상황을 대전성산교회 임동혁 원로목사(당시 후포교회 교역자, 대신중학원 교사)는 이렇게 증언했다. “신복성 장로는 주민들의 작목재배나 양계, 양돈을 지도하고 서울농대교수, 수원농림연구소 기술지도원 선생들을 봄·가을에 일주일씩 청하여 돼지를 잡고 잔치를 하면서 농민들의 정신계몽과 새로운 농사기술을 가르쳤다.” 이렇게 신 장로는 무지하고 가난한 농민의 정신계몽과 농사기술을 지도한 스승이요, 친히 솔선수범하여 성공한 선구자였다.
농촌자녀교육 - 대신중학원 설립
신 장로는 해방이 되자, 농민의 자녀들을 위해 1946년 4월 대신중학원을 설립했다. 자신의 농장 창고가 교실이고 방이 교사들의 거처였다. 교사들의 월급도 농사수입으로 댔다. 그러나 학원운영은 역부족이었다. 그때 임세흥 장로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신의주 사람으로 만주 중등학교 교장 출신이며, 만주 계림대학에서 약용식물을 연구한 식물학자였다.
당시 임세흥 장로가 서울 YMCA 등지에서 ‘민족정신계몽’ 강연을 했는데, 이 강연을 들은 신 장로가 그를 만나 초빙했다. 그래서 임세흥 장로가 2대 학원장이 되어 학원은 자리가 잡혀갔다. 마침내 1953년 학교법인 대신학원설립에 이어 중학교 인가가 났고, 임 장로가 초대교장에 취임했다.
재단설립, 학교 부지구입, 교사 신축, 고등학교 인가 등 일련의 사업은 신 장로의 투자와 교장 임 장로의 학교운영과 재정적 뒷받침을 해주었고 그리고 두 분의 신앙과 화합으로 잘 이뤄졌다. 신 장로는 대신학원 ‘창설의 아버지’였고, 임 장로는 ‘중흥의 아버지’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