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信行)으로 개명하고, 상주교회 재건하다

1941년 12월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젊은 사람들을 군인과 징용으로 강제로 징발했다. 당시 33살인 황신행 목사도 징용으로 끌려가 비행기 공장에서 일했다. 이때 모든 한인들에게 창씨개명(創氏改名)하라고 명령했다. 즉 한국식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그가 예수를 믿고 보니, 평소 이름에 불만이 있었는데, 이 기회에 신앙적 이름으로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어 곧 ‘믿음으로 살자’는 뜻으로 믿을 신(信), 행할 행(行)자로 바꿨다. 이때부터 그는 황신행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또 해방이 된 후 새 이름을 등록할 때도 황신행으로  신고했으며 그 이름대로 살기 위해 기도도 많이 하고 노력을 했다.

그는 해방되기 직전에 귀국했다. 전쟁말기가 되자 일본에는 연합군의 잦은 폭격과 지진이 계속 일어나 무서운 공포심이 사회를 뒤덮고 있었다. 그는 1944년 말에 징용을 제대한 후 이제 조국으로 돌아가자고 아내와 합의하고 1945년 1월에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자기보다 몇 달 전에 일본을 떠나 귀국한 정희섭 전도사가 생각나서 여기저기 수소문해보니 경북 청도의 한 장로교회에 목회하고 있었다. 당시 성결교회는 일제에 의해 1943년 말에 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청도로 이사가서 청도교회에 다니다 상주에 농업지도원 자리가 생겨 일하기 위해 상주로 옮겨 상주장로교회에 다니다가 8·15광복을 맞았다.

그는 해방의 기쁨과 감격도 컸지만, 무엇보다 1943년 12월에 해산된 옛 상주성결교회를 찾았다. 옛날의 교회건물은 있었지만 그동안 여러 사람이 사고 팔아서 찾기가 복잡했다. 할 수 없이 포기하고 그가 어느 절간 앞을 지나다 보니, 절간이 텅 비어 있었다. 본래 일본인의 사찰인데, 해방이 되어 주인인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쫓겨 간 것이다.

‘그렇지. 이 절간을 인수하고 수리해서 교회로 만들어 예배드리자’
그가 이렇게 생각하고, 목수들을 불러다가 수리를 하고 있는데, 한국인 중들이 몰려와서 ‘왜 자기네 절간을 예수쟁이가 와서 빼앗느냐?’고 해서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기도 했다.

해방 직후, 일본인 집은 적산(敵産)이라고 해서 누구든지 먼저 소유신고를 하면 미 군정청에서 허가를 해주었기 때문에 서로 소유하려고 싸웠다. 그는 성결교회를 세우려는 욕심에 원치 않은 싸움을 했는데, 그가 워낙 힘이 좋으니 저들이 당할 수 없어 물러갔다. 그래서 절간을 수리해서 마침내 교회 간판을 붙였다. 이것이 상주성결교회였다. 그는 안창기 목사를 교역자로 모시고 그들 내외는 집사로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며 일했다.

그런데 1946년 9월이 되자 안창기 목사가 그를 부르더니, 경북 함창교회가 아주 약하니 가서 열심히 전도하여 교회를 부흥시켜 보라고 했다. 당시 시골교회는 교역자가 많이 부족할 때여서 신앙 좋은 집사들을 전도인으로 파송했다. 그는 본래 우직하여 곧 순종하고 교회에서 철야하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한 후 부임해보니 첫 주일에 겨우 장년 7명이 모였다.

‘교회도 없고, 사택도 없고, 대지 한 평도 없었다. 나는 낙심하지 않고 셋방을 얻어 살면서 셋방에서 예배드리다 겨울에 움막에서 결사적으로 기도한 후, 전국교회를 순회하여 900원의 건축헌금을 마련하자뜻밖에 어느 성도가 100평의 대지를 헌납했다. 그래서 흑벽돌로 초가지붕을 얹어 20여 평의 교회당을 짓고 이듬해 사택도 지었다.’ 그의 노트 기록이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전도하며, 장날에는 노방전도를 해서 2년 만에 장년신자 80명, 어린이 150명이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신자들이 그를 배척하자, 그는 2년 반 만에 보따리를 싸서 신자 5명이 모이는 김천 다수동교회로 전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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