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열매, 그리고 빈손

일찍이 신복성 장로에게 선진농업을 지도받은 덕에 후포리나 대신면은 지금까지도 인근 지역보다 농업기술이 앞섰다. 근래에 대신농협의 오이가 가락시장에서 인기 농산품으로 인정받을 만큼 발전한 것도 신 장로의 신농업 계몽과 기술지도 덕이라고 생각한다.

전국적으로 여주의 고구마는 쌀과 함께 유명한데, 이것도 고구마할아버지 신복성 장로의 잘살기운동의 열매였다. 여주군 대신면 한강유역 낙화생(땅콩)의 품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한때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했다. 이런 엄청난 결과는 그가 풍양동마을을 개척 설립하고 난민과 함께 갯벌을 일궈 농사를 지은 게 시작이었다. 요즘에는 고구마를 생산한다.

신 장로가 초대 장로로 평생 섬긴 후포교회는 초기에는 경기도에서 몇 번째 가는 교세를 자랑했다. 지금도 여주서부·양평지역의 중심교회로, 내년이면 80주년을 맞는다. 후포교회는 지금까지 3개 지교회를 세우고  5개 교회 설립을 도왔으며 교역자도 다수 배출하였다.

기독교신앙과 덴마크 개척정신을 기치로 설립한 대신학원은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그 정신을 배우고자 각처에서 학생들이 모이는 유명사학농업학교였다. 지금은 인문계 학교로 바뀌어 임세흥 교장의 아들 임희창 목사가 5대 교장으로 헌신하고 있다.

또 신 장로의 재산으로 고흥상업고등학교가 학교법인 인가를 받았는데 현재는 서울 상계동에 있는 청원여자고등학교(이사장 이인근)이다. 풍양동마을은 정부로부터 갯벌을 불하받아 완전 정착하였고, 70여 년이 지난 현재 50여 가구의 농촌마을인 풍양동이 있다.

천호동 난민촌은 오랫동안 집단마을을 유지하다가 도시개발로 지금은 흔적이 없다. 60여 년이 지난 오늘 풍양동에서 그의 공로는 기억되지 않는다. 풍양동 주민 김원아 씨의 말이다. “신복성 장로님은 어려웠던 시절 대신면의 발전을 위해 헌신했고 특히 풍양동을 설립한 분이죠. 어려운 처지에서 사욕을 접고 희생하셨죠. 이제 좀 살 만하니 공덕비라도 세워야 하는데, 세월이 지나 주민 구성원도 많이 바뀌다 보니 지금 세대는 그분의 공로를 몰라 안타까워요.”

또한 신 장로는 대신중고등학교 설립자의 명예를 누리지 못했다. 어느 시점부터 임 교장과의 불화로 학교 운영에 손을 뗐는데 그 후 학교 측의 공석이나 학교역사기록 어디에도 설립자의 이름 석 자는 없다고 한다. 임 교장과 신 장로 두 분은 각각 학교의 ‘창설’과 ‘중흥’의 어버이로 똑같이 훌륭한 스승인데 말이다.

학교를 잃은 신 장로는 섭섭한 마음을 평생 학교가 발전하기만을 기도하며 달랬다. 그 대신 그는 교회봉사에 전념하였고, 임 장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학교를 발전시켰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한 분은 나무를 심었고, 또 한 분은 물을 주어 키웠듯이’ 하나님께서 두 분의 역할을 나눠주셨다고 본다.

이처럼 그는 전 재산과 온 생애를 선한 일에 투자했건만 열매는 그의 손을 떠났고 명예마저 잃었다. 과수원에다 산소도 남의 땅이고 남은 집마저 장애인시설로 내놨다. 일생을 하루같이 소처럼 갈고 말처럼 달려 하나님의 사람으로, 봉사자로 산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가 소천 후 가족은 집도 땅도 다 내 놓고 발에 먼지를 털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빈손! 그의 빈손은 하늘에서 큰 상급으로 채워질 것이다. 그의 상이 더욱 클 것은 세상에서 보상받지 못했기 때문이다(마 6:2). 가난한 자의 아버지, 농촌자활운동의 기수는 이렇게 살면서 하늘의 상을 바라보며 감당했으리라. 신복성, 그는 애당초 하늘의 사람, 그의 땅과 그의 나라는 하늘에 있었다. 그의 묘비에는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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