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성애소년단사건

1924년 강경성결교회에 다니는 윤판석은 백신영 전도사에게 신앙심과 민족교육을 받았다. 그가 1924년 강경보통학교 5학년 때 일제는 조선역사를 폐지하고 일본역사를 가르치게 되자 윤판석이 단장으로 있는 성애소년단원 중 반우 8명이 똘똘 뭉쳐 수업을 거부하고 모두 뛰쳐나와 자퇴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강경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경성애소년단사건이다. 윤판석은 이후 보통학교 때 함께 수업거부운동을 벌였던 김수련의 제안으로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고 구국의용군 제3로반 담당책임자로 일하며 주로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을 했는데 이때 큰 힘이 된 사람이 백신영 전도사였다. 

백신영 전도사는 1927년에 강원도 강릉성결교회에 파송되어 전도, 교육, 각 교회 부인회 조직 등으로 크게 역사했다. 1927년부터 서울체부동교회로 전임하여 1933년까지 시무했다. 1933년에 경성성서학원 여자부 사감으로 부임하여 10여 년간 봉직하면서 후진 양성과 부인회연합회운동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부인회운동     
그는 부인회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부인회가 조직된 교회가 많아지면서 성결교회 여성 지도자들은 전국연합회를 조직하는 데 뜻을 모으고 1934년 9월 10일 아현교회에 33명이 모인 가운데 발기인대회를 열고 그해 9월 29일에는 성서학원에 모여 ‘성결교회부인회 전국연합회’를 결성했다. 초대 회장으로 선출된 백신영 전도사는 전국조직의 산파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일제가 전국부인회를 해산할 때까지 회장으로 수고했다.

광복 후 재건에도 견인차 역할을 하는 등 전국부인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전국부인회 활동은 초기에는 주로 성미를 모아 교회의 경비에 보탬이 되거나 미자립교회들에 재정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특히 전국부인회는 본 교단의 남만주선교와 형평사원(천민계급 특히 백정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하기 위한 정치적 투쟁을 목적으로 창립된 정치결사체) 전도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전국부인회에는 종신회원과 일반회원이 있었다. 종신회원은  20원을 헌금하고 종신토록 전국부인회 회원으로 봉사하겠다고 서약한 부인들이었다. 이후 “여교역자와 남교역자 부인은 다 종신회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백신영 회장의 건의에 따라 가결되어 범위가 넓어졌다. 또한 전국부인회는 부인회수양회를 개최했다. 최초의 수양회는 1938년 4월 18일부터 성서학원에서 열렸으며 대회 마지막 날에는 총회도 진행했다. 보통 한 주간의 수양대회에 800~900명이 참가했으며 수십 명의 장로교나 감리교 여성들이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부인회전국연합회는 1934년 11월 5일에 부인회전국연합회 기관지로 ‘기쁜 소식(Good News)’을 발행했다. 발행인은 동양선교회 박부락 선교사였으며 이명직 목사가 주간이었다. 월간으로 발행된 ‘기쁜 소식’은 이후 ‘활천’과 더불어 성결교회를 대표하는 기관지가 되었다. ‘기쁜 소식’은 당시 여성을 위한 기독교계 유일의 잡지로 창간 1년 후부터는 1만 부 이상을 매달 발행해야 할 만큼 교파를 초월하여 여성신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백신영 전도사는 여자 기독청년회(YWCA) 교사 겸 종교부장, 대한적십자 봉사부원을 맡아 대내외적으로 활약했다. 그 후 뜻하지 않게 ‘유암'이라는 난치병으로 고생하던 중 1950년 6·25전쟁을 맞아 피란생활 중에 서울수복을 며칠 앞둔 1950년 9월 22일 오후 6시에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 당시 그의 시신은 사직공원에 가매장됐다가 1954년 미아리공동묘지로 이장됐다. 백신영 전도사는 하나님 나라로 갔으나 헌신적인 복음운동과 애국운동, 그리고 성결교회의 여성운동사에 큰 획을 그어 후대에 소중한 역사의 유산을 남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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