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감격에 찬 신앙인 신복성

인화(仁化)를 평생 좌우명으로 산 신복성 장로의 폭넓은 교제로 그의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 돕는 자들이 모여들었다. 신앙으로 다져진 그는 태산 같은 난관에도 요동이 없었고, 끊임없이 계속되는 새벽기도는 하늘로부터 믿음과 지혜, 용기와 힘을 충전받는 원천이었다. 그의 삶과 사역은 곧 그의 신앙이었다.

그는 도량(度量)이 큰 반면 생활은 검소했다. 서울을 가려면 지평 기차역까지 사오십 리를 걸었고, 땅을 더 매입하는 것이 시급하다며, 제대한 아들에게 한동안 제대복을 입게 했다. 그가 벌여 놓은 일로 자신과 가정을 챙길 틈이 없었으나 남에게는 후했다. 난민 수십 명을 먹여 살릴 때 차남을 낳았는데 집에는 쌀이 없을 정도로 자신과 가족에겐 인색했다.

그리고 그는 근면했다. 일생 동안 소처럼 밭을 갈았고 말처럼 뛰어다녔다. 그는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성경말씀을 즐겨 말했다. 그는 식물을 좋아했다. 뜰과 길엔 온통 기화요초가 만발했다. 겨울에도 내실은 온통 화분으로 가득했다.

그는 무엇보다 땅에 애착이 많았다. 후포리의 과수원 총 8만 평, 천호동의 과수원 1만 평, 갯벌 땅 15만 평을 확보했다.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땅을 버리면 안 된다”는 말은 그가 자녀들에게 자주 했던 말이다. 그는 독서량도 방대했다. 그의 큰방에는 책이 가득했다.

눈물과 감격에 찬 신앙인 신복성
그는 무엇보다 예수 믿고 지난날의 생활을 청산하고 크게 변화되었다. 1949년 2월 6일, 38세에 장립을 받아 후포교회에 초대장로가 된 그는 바쁜 생활에도 새벽기도에 빠진 적이 없었다. 늘 뜨거운 신앙을 소유했다. 그의 기도와 설교에는 간절함과 감격과 눈물이 있었다. 길을 가면서도 기도했고, 누구와 동행하면서도 입에서는 신음하듯 ‘주여’라고 했다.

꿀벌 통 앞에서 벌의 생활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 흘리다가 그 자리에 엎드려 기도하는 장로였다. 임동선 원로목사(동양선교교회)와 같이 취침할 기회가 있었는데 밤중에 기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의 신앙을 흠모하였고, 그분과 함께 정재학 목사님을 존경하였다. 일생 그 많은 일과에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그런 신앙의 에너지가 그에게 엄청난 일을 감당하게 한 것이다.

그의 삶은 곧 전도였다. 사회에서 언제나 장로로 인정받았으며, 학교 설립, 난민촌 설립 등 방대한 사회사업은 전부 직간접적인 전도였다. 풍양동 난민촌의 주민들을 저녁마다 예배드리도록 지도하고 주일에는 반드시 교회에 나와 은혜를 받게 했다.

그는 교회를 무척 사랑했다. 평생 교회 일을 내 일처럼 했으며, 성전 건축에도 힘썼다. 1956년에 신축한 후포교회의 세 번째 성전은 신 장로의 믿음과 배짱으로 이뤄진 걸작이다. 생석회벽돌로 지은 80평 예배당은 당시 서울 청량리에서 여주까지 오는 국도변에서 제일 컸다고 한다. 여주·이천·양평 지역 성결교회 연합행사는 1970년대까지도 후포교회에서 하는 전도였다.

1960년대 후반, 신 장로는 또 성전 지을 꿈을 품었다. 성전이 작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에서다. 철근을 사다 놓고, 강모래로 벽돌 10만 장을 찍어 놨다. 당신에게 돈이 좀 생기면 틈틈이 준비하는 것이다. 가난한 교인으로 성전 건축은 쉬운 일이 아니기에 한강변에서 골재·사금채취사업을 시작했으나 장마에 배를 잃고, 사기꾼에게 당했다. 신 장로는 감옥에 간 사기꾼을 풀어주었지만 이 일을 두고 심려한 나머지 병이 와서 1978년 67세의 일기로 소천했다. 성전은 신 장로의 정신을 본받은 교인들의 힘으로 건축되어 1979년에 준공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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