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수피아학교의 수업

정중흥은 1914년 4월 21일 전북 정읍에서 아버지 정우경 씨와 어머니 김마리아 씨 사이에서 딸 셋 중에 막내딸로 태어나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어렸을 때는 근동에서 부자로 살았으나 3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세가 기울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 셋을 키우기 위하여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고향을 떠나 순창으로 이사를 온 그의 어머니는 딸 셋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고, 궁핍한 살림을 감당하면서 기도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가 7세쯤 되었을 때 한 동네에 살던 친구가 옆 마을에 아주 재미있는 곳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따라 나섰는데 그 곳은 바로 정중흥을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집, 순창교회였다.

당시만 해도 유교적인 풍습에 의해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전통적 관념이 심해서 조그만 시골의 교회였지만 어른들 예배는 물론, 주일학교 예배마저도 가운데 포장을 치고 남자들은 왼쪽, 여자들은 오른쪽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왼쪽 한 번 쳐다보고 오른쪽 한 번 쳐다보며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소녀 정중흥은 열심히 순창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순창교회에 선교사 두 분이 방문하였다. 순창교회를 방문한 선교사는 교회 학생들에게 “여자 아이들 중에 공부하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 보세요”라고 말했다. 이때 그녀와 바로 위의 언니가 손을 번쩍 들었다. 많은 어린이들 중 손을 든 사람은 두 사람뿐이었다.

예배 후, 선교사들을 만나 본 그녀와 언니는 돈 한 푼 없이도 공부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아주 기뻤다. 마침내 그들은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선교사들을 따라 광주의 수피아 여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때 수피아 여학교는 보통학교 과정이 있었고, 중등학교 과정과 또 고등학교 과정이 따로 있었다. 보통학교 과정은 오늘의 초등학교 과정이었고, 중등과정과 고등과정도 오늘과 비슷하였지만, 당시 일본이 지배하던 시절이어서 일본어와 한글을 함께 배웠다. 

난생 처음으로 한글과 일본어를 배우고, 또 산수와 도덕, 미술과 음악을 배우니 그녀는 비로소 사람구실을 할 것 같았다.

선교사들이 세운 미션스쿨에서 신앙교육을 받으며 그녀는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고, 중등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열심히 한 그는 중등과정도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후, 고등학교 과정에 진학하여 우수한 실력으로 졸업하였다.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통하여 그녀는 장차 기독여성으로서의 자질을 함양하였다. 학비는 미국의 성도들이 보내 준 후원금으로 공부하였다.

중학교 3학년 때, 후에 서울정신여고 교장을 역임한 김필례 선생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분의 교훈이 정중흥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여자는 꼭 가정을 가져야하고 가정을 지켜야 한다. 좋은 아내가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되어라. 훌륭한 사회는 우리 여성들의 손에 달려있다. 좋은 일에는 남보다 앞장 서야 한다. 그러나 나쁜 일에 절대 가담해서는 안 된다.”

김필례 선생의 이 교훈은 정중흥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평생을 메아리치는 음성이 되었다. 더구나 그때는 18세의 소녀, 참으로 꿈이 많고 방황하기 쉬운 시절인데 그 교훈이 평생을 지배하는  삶의 등불이 되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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