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박해

한도숙 전도사는 이른 새벽에 일본형사들이 김기삼 목사를 검거하러 오자 이미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형사들이 수색하는 동안에 재빠르게 아침밥을 지었다.

한 전도사는 일본 형사에게 의연한 자세로 침착하게 말했다. “아침밥이 다 되었으니 조반을 잡숫고 가시도록 해주시오.” 김 목사는 밥공기에 물을 부어서 물만 마시고 일어섰다.

형사들은 두 뭉치의 책과 담요를 김 목사의 손에 들려주고 최후의 유언이나 하라는 듯이 “집안에 부탁해 둘 말은 없나? 있으면 지금 해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주저하다가 사모 한 전도사를 향해 “올 것이 왔으니 나는 가오, 주께서 오실 터이니 소망을 가지고 깨끗하게 살도록 힘을 쓰시오. 아이들을 잘 부탁하오. 영희의 병이 웬만큼이라도 회복되거든 속히 고국으로 돌아가시오”라고 말했다.

한 전도사는 김 목사가 갇혀있는 동안 교회가 폐쇄되자 신도들을 이끌고 동포교회인 이가노이교회를 찾아갔다. 그 교회는 일본국민의례가 예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한 전도사가 그 교회 목사와 간부들에게 신도들을 부탁했지만 그들은 이단자를 대하듯 냉정하게 거절했다. 재림의 신조를 청산한다는 서약서를 제출하고 예배에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신도들은 그 교회에 나가지 않고 몰래 폐쇄된 이마사도성결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했다. 컴컴하지만 불도 켜지 않고 20여 명이 모여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흐느끼며 기도하고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갔다.

그런데 교인 몇 사람이 이마사도교회를 재건하겠다며 일본정부의 어용교회 목사를 찾아가서 배교의 타협을 했다.

그들은 재림의 신앙을 버리고 교회간판을 바꿔붙이기로 했다. 또 한도숙 전도사와 그 가족들을 이사시켜 목사관을 비우기로 타협했다.

그리하여 한 전도사는 5남매를 이끌고 오사카 주변에 있는 히라노(平野)라는 한적한 곳으로 이사했다. 어용 목사의 말을 믿고 교회 문을 열었으나 집회법 위반으로 간부들은 20일간 구류를 당했다.

구류를 당했던 간부들이 감옥 생활의 고통을 겪은 후 비로소  잠시나마 배교했던 죄를 회개하고 김 목사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배려했다.

교회의 선풍기, 책장 등을 팔아 만든 500원을 한 전도사에게 주었다. 한 전도사는 그중 150원을 들여 재봉틀을 사서 옷 수선 집을 차렸다. 교인들을 비롯하여 옷을 수선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 가족의 생계를 무난히 유지할 수 있었다.

일본 형사들은 한 전도사를 찾아와 일본형사의 강요로 쓴 김 목사의 자서전을 일일이 대조하며 심문했다. 만약 대조심문에 협조하지 않으면 한 전도사를 투옥하여 5남매의 자녀를 고아로 만들겠다는 협박과 회유로 정신적인 고문을 가했다.

김 목사의 설교내용, 그의 동아일보사 재직 중에 반정부음모여부, 기독교목사가 된 동기, 재림운동과 세계를 제패하려는 시온운동과의 상통여부, 설교내용 등을  집요하게 대조 심문했다.

한 전도사는 김 목사가 옥고를 치르는 동안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심한 고생을 하면서도 남편 김 목사의 도시락을 정성껏 마련하여 면회 가는 것을 보람으로 알고 고생을 참고 견뎠다.

김 목사도 감옥에서 모진 고생을 하지만 아내의 면회로 위로받고 정성껏 마려해온 도시락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힘을 얻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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