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성(辛福成) 장로는 38세에 장로로 장립받을 만큼 신실한 교회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종이었다. 또한 천성적으로 의협심(義俠心)이 뛰어나 가난한 자의 아버지로, 무지한 농민의 스승과 선구자로 불처럼 자신을 희생하며 살았다. 그가 한 일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는 농촌계몽자립운동이고, 다음은 학교설립이다. 그리고 피란민 구호 및 정착촌 설립과 하나님 앞에 신실한 신앙생활 등이다.

출생과 성장

신복성은 1912년 2월 7일, 옛날부터 쌀과 도자기로 유명한 경기도 여주,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농촌, 강천면 강천리 갯골마을(현 가야2리)에서 가난한 농민 신재갑 씨의 장남으로 태어나 19세에 여주군 대신면 옥천면(옥터거리) 임씨 집안의 무남독녀 16세 규수 임은식과 결혼하였다.

신복성은 힘 좋고 패기만만한 청년으로 ‘아버지, 이 소는 복성이가 끌고갑니다’라는 쪽지를 쇠말뚝에 남겨 놓은 후 소를 팔아 안경장사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나, 결혼식 때 아버지가 무슨 일인지 신부 가마꾼들을 질타하자 그들 네 명이 대들었는데, 이때 신랑 신복성이 하인들을 기세등등하게 굴복시켰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일화였다.

젊은 시절에 원근각처를 다니며 안경장사, 약재선전원 등으로 열심히 일했다. 한번은 자전거로 어느 비탈길을 달리는데 어디선가 ‘복성아’ 하는 소리에 급정거해 보니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장마에 길이 끊긴 것이다. 이 일은 신앙생활 전에 겪은 것인데, 후에 신앙생활을 한 후에야 크게 깨닫고 “나 같은 놈을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지주 간증을 했다. 그 후 그는 신(辛)씨 집성촌인 대신면 후포리로 이사하였다.

기독교 입문과 소명

그 무렵인 1936년에 함경남도 원산에 사는 신치정 씨가 후포리에 와서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다. 그는 후포리에서 자란 불우한 소년으로 13세에 가출하여 원산에 가서 물장사를 시작으로 부자가 되었고, 예수 믿어 새사람이 되었다.

신치정 씨가 고향인 후포리의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교회를 세우고, 열심히 전도하고 기도하므로 장로교회에서 그에게 영수의 직분을 임명했다. 당시 영수는 교역자가 없는 교회에서 일종의 평신도교역자 역할을 한 직분이다.

신치정 영수는 회갑이 넘은 나이에 고향 후포리에 당신을 변화시킨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자 돈과 생활필수품들을 풍부하게 가져와 고향의 빈민들을 도우며 열심히 전도하였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청년들에게는 땅을 사주고 사업자금을 대주었다.

신복성도 신치정 영수의 전도로 교회에 출석하였고, 그의 도움으로 동네에다 기름틀 집을 차렸으니 1938년 그의 나이 27세였다. 신치정 영수는 후포리에서 보통 원산할아버지로 불렸는데 그가 신복성을 만나고 난 후 장차 교회 지도자가 될 재목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신복성은 서울 모 교회 부흥회에서 큰 은혜를 받고, ‘동족이 다 굶어서 죽어 가는데 나만 잘살아보려고 애썼다’고 뉘우쳤다. 그리고 동족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기도하였다. 그는 민족을 위해, 교회를 위해 끓는 피를 쏟을 고귀한 희생정신이 후포교회에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이 헌신하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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