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교회로 보내 6·25의 고통을 면함

황신행 목사는 성미가 곧아서 신자들이 싫어하면 곧 교회를 떠났다. 아무리 어려운 교회라도 가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면 하나님이 교회를 부흥시켜 주신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가 1950년 6·25 전쟁 전 김천에서 1년간 시무하면서 장년 30명쯤 모였을 때 갑자기 영천 하양교회라는 조그만 교회에서 어떤 집사가 찾아와 자기 교회로 부임해 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 교회를 위해 기도하니까 자꾸 목자 없는 양같이 그곳 신자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어 ‘이 교회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보다’ 라고 생각하고 교회에 사표를 내고 영천으로 갔다. 6·25가 일어나기 3개월 전이었다. 김천에 있었다면 공산당에게 시달렸을 텐데 몇 개월 전에 옮겨 공산당은 구경도 못했다. 그를 하나님이 미리 피란시켜 주신 줄 알고 감사했다.

그런데 1951년 5월 전에 그를 배척했던 함창교회에서 다시 청빙 제안이 왔다. 저들의 말은 ‘역시 황 전도사님이 진짜 교역자다’라고 듣기 좋은 말로 자꾸 와 달라고 해서 함창교회에 두 번 부임해서 일했다. 그런데 치리목사가 그에게 “기왕 목회하려면 정식으로 공부해서 목사가 돼라”고 해서 1951년 9월 초에 부산 피란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는 전쟁 중이라 신학생들은 천막에서 먹고 자고 그 자리에서 공부하는 고달픈 생활을 했지만 가장 은혜 충만한 생활을 했다. 신학생들은 미국 성도들이 구호품으로 보내준 밀기울과 버터, 치즈를 먹으면서도 밤에는 금정산에 올라가 소리쳐 기도하며 영성을 강화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3세로 동기생 중에 가장 많았다. 동기생 중에는 김성호, 황대식, 김현명, 이상훈 등 인재가 많았다. 그는 나이가 많다고 점잔을 빼지 않고 오히려 남들이 싫어하는 변소청소를 자원해서 많이 했다. 그래서 동기생들이 그를 ‘솔저(졸병)’라고 불렀다. 

그는 이 별명을 좋아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에게 “I am a soldier(나는 졸병이다)”라고 말했다. 주의 졸병은 용감해야 하고, 대장이신 주님이 명령하시면 절대 복종해야 하는 병정이다. 또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졸병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겸손한 교역자로 살고 싶었다.

학교에 다니면서 주말에는 상주교회에 가서 목회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북교회로 옮겨 목회했다. 학교에서 배우고 감동된 것을 교회에서 설교로 가르치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또 신자들도 더 은혜를 받아 좋아하는 것을 보고 역시 교역자는 죽는 날까지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53년 정전협정이 이뤄져 그해 말에 서울신학교가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고 이듬해부터 월요일마다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기숙사에서 지내며 공부하다 금요일마다 밤기차를 타고 임지인 경상도 상주에 가서 심방하고 목회했다.

그는 1955년 3월 10일에 졸업하고 그해 5월 28일 서울신학교에서 열린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당시 전도인 목회 5년이면 목사고시를 볼 수 있었고, 합격하면 목사안수를 받았는데 동기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그가 가장 먼저 목사가 되었다.

그는 안수받은 후 군위 의흥교회와 강구교회에서 목회했다. 그 후 교회를 건축하다 어려움을 겪는 안동교회에 부임했다.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울 때여서 건축 중에 신자들이 많이 떠난 뒤라 부임해 보니 신자가 20명밖에 없었지만 개척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해서 몇 년 만에 교회건축도 완성하고 부흥했는데 군위교회 목사의 요청으로 임지를 맞바꾸었다.

그는 군위에서도 장에서 열심히 노방전도를 해서 사람들을 예수 믿게 했다. 노방전도가 그의 특기였다. 신자가 자꾸 많아져 100명이 넘게 모여 건축 빚도 다 갚고 교회도 부흥되었다. 그러나 여전도사를 청빙하는 일로 신자들과 뜻이 맞지 않자, 그는 보따리를 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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