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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에게 광복이 왔다. 한반도는 감격스런 해방의 물결로 뒤덮였다. 그 해 그의 형이 19살에 결혼했는데 이듬해 그만 병으로 유복자를 남기고 소천했다. 이제 그는 졸지에 장남 노릇을 해야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그를 불러 앉혔다.“나는 땅을 갈아먹고 사는 농부지만, 너만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는 공부가 소원이던 차 아버지의 허락을 받자마자, 기뻐서 문 전도사에게 뛰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전했다. 문 전도사가 그의 공부와 미래를 위해 축복기도를 해 줬다. 그는 이듬해 2월에, 난생처음 아버지를 따라 기선을 타고 큰 바다를 건너 선망의 땅인 목포로 갔다. 그는 친척집에서 하숙하며 문태중학교에 시험을 쳐 합격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당시 목포의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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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7.08.23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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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신은 1929년 11월 13일 당시 전남 무안군 지도면 증동리에서 부친 이응백과 모친 조동례의 3남 3녀 중 2남으로 출생했다. 활달한 성격인 그에게 한가한 섬마을은 매우 단조로웠으나 그에게 삶의 변화가 찾아왔다. 1935년 그의 나이 6살 때 어느 여전도사가 마을에 방 한칸을 얻어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를 시작한 것이다. 문준경 전도사였다. 문 전도사는 어머니의 이모뻘이어서 어머니가 먼저 교회에 다녔다. 아버지는 기독교에 반대했지만, 먼 친척 되는 문 전도사를 반대할 수 없어 묵인하자, 아이들도 주일학교에 다녔다. 평소 별로 배울 것이 없던 그는 주일학교에 가서 말씀과 찬송을 배우는 것이 가장 신나고 즐거웠다. 누구보다 먼저 성경암송을 하고, 찬송을 잘 해서 성탄절 때 단골로 발표해서 상도 많이 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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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7.07.12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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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에서 부평제일교회가 차지하는 비중과 강신찬 목사의 지도력이 증대되면서 1999년 강 목사는 교단총회장에 피선되었다. 총회장 강 목사는 특유의 친화력과 지도력을 발휘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와 형제교단으로서 우의를 다지는 초석을 마련했다. 기성과 예성의 연합을 위해 예성총회장 장홍식 목사와 양교단총회장 강단교류를 열고 뜻을 같이 하여 연합운동을 결의하고 이를 위해 위원회를 조직했고 예성총회장을 부흥강사로 초빙하는 등 연합운동에 힘썼다. 한국성결교회연합회가 창립되고 양교단 산하 신학교와의 교류협력, 교회학교 교재 공동 집필, 캘린더 공동제작 등의 협력체제가 이뤄졌다. 총회장으로서의 강 목사는 서울신학대학교 대성전 공사를 마무리했고 철거직전의 만주용정교회를 중국과 협의해 복원하여 교단의 정체성을 학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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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7.06.07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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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제일교회 창립70주년을 맞아 공로자 및 장기근속자 표창, 미주성결교회의 요청으로 영문판 한국성결교회사(A History of Korea Evangelical Holiness Church)를 발간하고 그 비용을 부평제일교회가 전담했다. 교회창립 70주년 기념행사에 맞춰 헌정한 이 책은 강신찬 목사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영어를 쓰는 성결가족들이 교단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길이 되었으며, 성결교회에 관심이 있는 영어문화권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강 목사의 설교집 ‘그날이 오면’도 봉정했다. 강 목사는 평소 “선교는 남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 첫 번째 선교이고,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를 세우는 것이 두 번째 선교이며,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세 번째 선교다.” 라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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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전 본지주필)
2017.05.26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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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찬 목사는 1974년 3월 1일 부평제일교회로 부임해 모든 성도의 ‘예수의 제자화’를 명제로 삼고 이를 이루기 위해 매진했다. 먼저 ‘찬송하는 교회, 교육하는 교회, 선교하는 교회’라는 3대 세부 목표를 정해 성도들이 목회 방향을 잘 따라올 수 있도록 준비했다. 3대 목표에 대한 교육 중점은 찬송을 통한 정서함양과 감사의 생활화, 말씀의 생활화와 예수의 제자화에 두었다. 교회 내적으로는 성도 교육에 힘쓰고 교회 외적으로는 복음전파와 교회개척, 선교사 파송, 미자립 교회 보조 등의 선교와 사회봉사에 주력하며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전력했다. ‘예수의 제자화’ 사역 가운데 강 목사는 특히 선교와 대사회 봉사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1988년 일본 히로시마교회 재건에 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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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7.04.1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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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찬 목사가 강릉에서 2km 떨어진 농촌마을 신석교회에 시무하는 여전도사의 아이가 잘못됐다는 전갈을 받고 가보니 아이가 죽어 있었다. 그는 아이를 잃은 여전도사가 측은하고 이 일로 인해 마을 전도의 문이 막힐 것 같아 착잡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떠올리게 하셨다. 강신찬 목사는 여전도사와 여집사를 밖으로 내보낸 후 아이를 끌어안고 간절히 기도했다. “주여! 이곳에 복음의 문이 닫히지 않게 해주옵소서. 저 가련한 여인을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옵소서. 필요하면 제 생명으로 대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당신께서 나를 택하셨다면 그 증거로 이 아이를 살려달라고 몸부림쳤다. 그러자 품에 안긴 아이가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소리쳐 밖에 있는 이들을 들어오라고 하여 아이를 여전도사에게 주었다. 여전도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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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7.04.05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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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찬 목사는 고교시설, 강릉상업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몇몇 친구들과 장래희망을 토론하던 때 전혀 생각지 못하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난 너희들이 성공하면 너희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말이 씨가 되었는지 그는 1955년 부친의 간곡한 성원을 마다하고 연세대학교 입학을 포기했다. 대신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이 일로 강 목사는 부친에게 외면당해 고아 아닌 고아처럼 되어버렸다. 당시 강 목사는 일반대학보다 신학교에 가면 신앙이 잘 성숙하여 훌륭한 신자가 되리라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신학교 입학면접 때 “왜 신학교에 왔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소명도 사명도 아닌 “신앙 지키려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입학이 되어 기숙사생활이 시작되었다. 신학교에는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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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7.03.0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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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식 목사는 창의적 생각을 새벽기도회 후 3시간 정도 당회실에서 한 독서에서 얻었다. 평소 읽고 싶은 책들을 미리 사서 쌓아두고 계속 읽으며 메모했다. 그가 읽은 책은 국내 교수들의 서적도 있지만 외국의 저명한 교수들의 번역 책이 많다.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을 그런 책들을 통해서 파악하고 사색하고, 적응하기에 힘썼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긍정적이고 앞서가는 아이디어와 감화력이 있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 그는 1974년 안식년을 맞아 일본 동경신학대학에 연구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를 졸업했기에 일본어에 자신이 있어 1년 간 대학원 연구생으로 공부하면서 많은 지식과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첫째로 교수가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외국어 원서를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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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7.03.0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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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식 목사는 상도교회에 부임하여 2~3년이 지나자 낡고 좁은 교회당을 새로 건축하기로 하고,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40일 기도’를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 모아두었던 ‘금붙이’ 11점을 ‘40일 기도’ 첫날 새벽기도회에서 건축헌금으로 바쳤다. 이를 계기로 성도들의 금붙이 헌납이 이어졌다, 또 가정마다 헌금함을 나누어주고 한 달에 한 번씩 교회에 봉헌하게 했다. 그 결과 1970년에 착공한 건축이 전교인들의 큰 헌신으로 1972년 헌당할 수 있었다. 당시 상도교회의 건축은 교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예배중심의 과거 교회당 구조를 예배, 교육, 친교, 봉사 등 현대적으로 다양한 목회적 공동체를 접목한 교회당 구조로 바꿨기 때문이다. 당시 상도교회의 건축설계도를 가져다 건축하는 교회가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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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본지 전 편집위원장)
2017.02.2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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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식 목사는 사비로 사택을 전세로 얻은 후, 본격적으로 목회하자 신자들이 날로 증가되어 이웃집을 사서 헐고 그 대지 위에 교회당을 신축했다. 그는 당시 충주에서 초교파적으로는 처음으로 장의자를 놓고 신발을 신은 채 예배드리게 했으며, 가족끼리는 남녀가 함께 나란히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혼석예배를 드리게 했다. 양반고장인 충주에서는 파격적이었다.이 소문에 다른 교회 신자들 중 이를 좋게 생각하는 장년들과 청년들이 일부러 찾아와 등록하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 남들보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그의 사고방식은 진취적인 사람들에게 호응을 받았다. 활동성이 강한 그는 여학교 교목과 경찰서 경목도 했으며, 사회 봉사단체인 로타리클럽에도 가입하여 많은 유력인사들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이것이 교회의 성장에 큰 밑거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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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7.02.0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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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식은 3학년 때 1953년 7월 전쟁이 휴전 되었으므로 이듬해 서울 아현동 신학교로 복교했다. 그는 고향교회 목사의 간청으로 예산읍교회를 재건하는 데 앞장을 섰다. 예산읍교회는 일제치하인 1932년에 창립되었으나 1943년에 일제의 전국 성결교회 해산명령에 의해 해산되었다가 1953년 김만효 여전도사에 의해 한상윤 씨 댁에서 재건예배를 드림으로 재건되었다. 하지만 여전도사의 힘으로 개척교회를 감당하기가 너무 어려워 이웃 삽교교회의 이 목사의 권면에 따라 신학생인 황대식이 주말마다 서울에서 내려와서 설교하고 다시 월요일에 공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방학 때는 이곳에 상주하면서 심방과 설교를 병행했는데 점점 신자들이 증가되어 가자 그는 목회의 보람을 느꼈다. 그는 1955년 졸업과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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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7.01.11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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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식은 1948년에 중학 5년 과정을 마쳤지만 당시 조국이 광복이 되고 남북이 38선으로 분단되었다. 남쪽은 미군이 군정을, 북쪽은 소련이 군정을 하면서 시국이 매우 혼란했다. 해방으로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자들이 귀국하여 저마다 새로운 정부를 구상했기 때문이다. 소위 미국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승만파, 소련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여운형파, 중도 남북연합을 주장하는 김구 등에 따라 파벌이 형성되어 혼란했다.황대식은 해방된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당시 고향 출신 박헌영이 소련에 가서 공부한 후 공산주의자가 되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책임자로 남한에 파견되어 은밀히 고향 동지들을 찾았다. 중학 동창생들 중 박헌영에게 가담한 자들이 황대식에게 연락했지만 그는 신앙이 있었기에 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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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성결인물연구소)
2017.01.04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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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식(黃大植)은 1931년 3월 5일 충남 예산군 삽교면 용동리 610번지에서 부친 황갑진과 모친 신소희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6살 때부터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후 8살 때 십리되는 보통학교(초등)에 입학, 졸업했다. 계속 배우고 싶었지만 가정이 가난해서 바로 진학하지 못하다가 1년 후 부친을 설득하여 군내에서 유일한 중학과정(5년)인 예산농림학교에 진학했다. 학교는 그의 집에서 8km나 되는 먼 길이었으나 그는 향학열 하나로 날마다 뛰어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가 이렇게 배움에 열성인 것은 그의 집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당시 보통학교는 약간의 월사금을 학교에 냈지만, 고등보통(중)학교는 상당한 액수의 월사금을 내야했기에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은 대개 중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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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재하 목사(전 편집위원장)
2016.12.2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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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기는 상이용사의 신분으로 육군 중위로 의병제대를 한 후 몇 년간 몸을 정양하면서 오직 사명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주일학교 교사와 집사로 봉사했다. 그리고 나이 서른이 되자 성결교 신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신학을 공부했다.1965년 11월 27일, 성결교신학교를 제2회로 졸업한 이원기 전도사는 1969년까지 전북 익산의 남창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1969년 4월 30일, 예성교단 제8회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안수 받을 때 그는 감격에 벅찬 눈물을 흘렸다. 안수 받은 이원기 목사는 1972년까지 전북 완주의 용진교회를 3년 반 동안 섬기며 붉은 벽돌로 45평 성전을 건축하고 헌당을 했다. 그리고 임지를 서울로 옮겨 개척교회 같이 어렵고 힘든 운양교회를 열심히 섬겨 조금씩 부흥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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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6.12.14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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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기 소위는 심장 밑에 박힌 포탄 뇌관 수술을 마치고 삼일 만에 마취에서 깨어났다. 온 몸이 너무나 아팠지만 위생병에게 수요일 저녁이라는 말을 듣고 비틀거리며 침대 곁에 있는 목발을 잡았다. 위생병이 말렸지만 그는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교회로 가야한다고 외치며 발걸음을 떼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지은 ‘서쪽 하늘 붉은 노을’ 찬송을 부르며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로 3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40분이 걸려 군인교회에 도착했다. 이미 예배가 끝나서 천막교회는 조용했다. 비 오듯이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주의 음성이 그의 마음을 채찍질 했다. “나는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고통을 당하고 죽음으로 너를 살려주었는데 고통스럽다고 예배시간에 내 앞에 나오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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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신문
2016.11.3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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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이 소련의 지원을 받아 38선을 넘어 불법으로 남침을 했다. 한국의 청년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인이 되어 공산군과 싸웠다. 이듬해 이원기 청년은 국민병 소집 영장을 받고 군대에 입대한 이후, 장교 모집에 응하여 소대장이 되었다. 1953년 4월, 동부전선 가칠봉에서 아군과 적군이 서로 차고, 때리고, 찌르는 백병전이 펼쳐졌을 때 그는 소대장으로 열심히 싸웠다. 어느 순간 그는 왼쪽에서 터진 포탄의 화염에 휩싸여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쳐졌다. 그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후 겨우 정신이 돌아 왔을 때 전방 임시 위생소에 누워 머리에서부터 다리까지 계속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금방 온몸이 뒤틀리는 고통이 계속 찾아왔다. 그는 숨이 막히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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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6.11.0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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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을지로 4가 산림동에 살던 그의 아버지는 혹시 가족들이 월남하면 함께 살기 위해서 적산 가옥 한 채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 집에는 먼저 월남한 친척들 몇 가정이 살고 있었다. 친척들의 정보에 따라 그의 가족은 모두 영락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신의주제2교회를 섬기던 한경직 목사가 월남한 후 세운 ‘영락교회’는 처음 이름이 ‘베다니교회’였다. 이 소식에 월남한 사람들은 영락교회로 몰려들었다. 특히 정주, 선천, 신의주 등 평안북도 쪽 사람들은 영락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영락교회에 가면 고향사람들을 만날 뿐 아니라 고향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평안도 쪽 경의선 부근에서 월남한 사람들은 영락교회를 통해서 서로 만남을 갖고 고향을 떠난 설움을 달래며 낯선 이남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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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6.10.19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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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정책이 극단적으로 치달아가던 1931년 4월 3일, 이원기는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소산리 짝바우라는 시골 동네에서 본이 진안 이씨인 아버지 이종갑과 어머니 송신애 사이에서 2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배가 불러올 때에 아들을 낳는다면 목회자로 바치겠다고 서원했는데 그 아들이 목회자가 되는 꿈을 전날 밤에 꾸고 아침에 진통이 오기 시작하여 그를 출산하였다. 그의 집안은 친조모, 외조모 때부터 신앙생활을 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그것은 기독교 초창기인 1880년대에 황해도 출신 서상륜 등이 북경에서 선교사를 만나 세례를 받고 최초의 한글 번역 성경(로즈)을 몰래 가져와 서북부지역에서부터 복음을 전한 덕분이었다. 그는 모태신앙인이었으며 주변의 친척들 모두가 신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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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왕근 목사(대신교회)
2016.10.05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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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규 목사는 1939년에 개성교회의 주임으로 파송되어 일등벽돌로 예배당을 아담하게 새로 건축했다. 개성교회는 1909년 성결교회가 세 번째로 설립한 유서 깊은 교회다. 일본제국이 1943년 5월 24일에 성결교회예배금지령, 9월에 폐쇄령을 내렸다. 박 목사는 서울로 압송되어 이명직 목사 등 11명과 같이 6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박 목사 가정은 기초생계마저 막막해져서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었다. 사모 김은실 전도사가 고구마 잎을 주워서 삶아먹다가 부황이 생겨서 자녀들의 얼굴이 부어올라 학교를 보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가 박 목사가 선교사가 경영하는 개성명덕고등학교 교목과 사감으로 사역하게 되면서 생계가 안정되었다. 1945년 개성에서 8·15해방을 맞자 박 목사는 당장 일장기를 떼어서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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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6.09.2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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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회가 창립된 지 11년이 지났다. 100여 명의 신자가 주일예배 때 80~96인씩 모였다. 인천 4만5000명의 영혼을 대상으로 한 교회로서 전임 강송수 목사가 3년 전부터 예배당 건축운동을 시작했다. 4만5000의 인천의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가진 교회로서 예배당 신축이 시급했다. 인천교회는 예배당건축운동을 서둘렀다. 건축예산액 3600원을 목표해 오랫동안 기도했던 성전건축을 실현할 작정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헌금장려위원’을 선정했다.성전신축을 위하여 전교인이 매일 조석으로 기도하도록 공포하고 가정을 방문하여 헌금을 청한 결과 약속한 헌금이 700원에 달했다. 이 금액으로 조선체로 지어볼 작정으로 우두수(Woods) 선교사에게 보고했더니, 그가 미국성결단체 몇몇 교인들을 통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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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목사(전 본지주필)
2016.08.31 1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