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학구열과 저서

황대식 목사는 창의적 생각을 새벽기도회 후 3시간 정도 당회실에서 한 독서에서 얻었다. 평소 읽고 싶은 책들을 미리 사서 쌓아두고 계속 읽으며 메모했다.

그가 읽은 책은 국내 교수들의 서적도 있지만 외국의 저명한 교수들의 번역 책이 많다. 무엇보다 시대의 흐름을 그런 책들을 통해서 파악하고 사색하고, 적응하기에 힘썼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긍정적이고 앞서가는 아이디어와 감화력이 있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다 그는 1974년 안식년을 맞아 일본 동경신학대학에 연구생으로 입학한다. 그는 일제시대에 초등학교를 졸업했기에 일본어에 자신이 있어 1년 간 대학원 연구생으로 공부하면서 많은 지식과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첫째로 교수가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외국어 원서를 읽고 독후감을 발표하면 그 장단점을 서로 지적하고 토론하는 것이 매우 좋았다.

둘째는 공사립학교장을 두루 역임한 90세 된 박사가 한 달에 한 번 도서관에 책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반환하고, 또 새 책을 한 아름 빌려 안고 가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학문은 박사로 끝난 것이 아니라 평생 계속 공부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셋째는 교수들의 검소한 생활 모습에서 깨우침을 받았다. 학장의 방도 작고 비서도 없으며, 조그만 차를 운전하고 출퇴근하는 모습과 교수들이 모두 박사학위자였으나 박사라고 부르지 않고 서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모습, 학장 직의 순서는 미리 정해놔서 감투에 욕심이 없는 것, 또 점심시간에는 학장 및 교수 부인들이 와서 학생들에게 식사 서빙을 하는 것 등은 한국의 학교와는 달라서 감동이었다.

그의 학구열은 계속됐다. 아시아연합신대가 미국 풀러신학교와 목회학박사 과정을 협약하자 그가 처음으로 입학했다. 그는 학교에서 외국의 유명한 신간서적을 읽고 발표하고 토론하며 공부해 세계 신학의 동향을 파악하고 많은 것을 배웠다.

마지막 학기에는 논문을 작성하고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 가서 강의를 청취했으며 풀러신학교에서 1983년 봄에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논문은 교단의 명설교자 3분(이명직, 김응조, 이성봉)의 설교를 신약에 있는 설교형태와 비교분석한 것으로, 선배들의 설교가 너무 선포적이어서 돌봄과 조직적인 측면도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박사 가운을 입고 설교하지 않고, 초년병처럼 계속 새벽마다 신간서적을 읽고 공부하면서, 틈틈이 글을 집필했다. 그의 목회철학을 담은 저서들은 ‘설교형태 비교 연구’, ‘주님의 제자 되게 하소서’, ‘좋은 교사되게 하소서’, ‘좋은 장로 되게 하소서’, ‘좋은 집사 되게 하소서’, ‘좋은 권사 되게 하소서’, ‘교회성장 연구’ 등 7권으로 바른 목회의 길잡이 책이다.

그는 1999년 12월 16일 은퇴하고, 상도교회에서 원로목사로 추대 받았다. 그의 호적상 나이는 1931년 3월이므로 1년 3개월이나 정년이 남았지만, 서둘러 은퇴한 것은 그의 출생이 호적보다 빠른 1929년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21세기가 되기 전에 은퇴하므로 새로운 세기에 새로운 목회자가 목회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그만큼 정직할 뿐 아니라, 교회를 배려하고 또 남을 배려할 줄 아는 큰 그릇이었다.

황대식 목사는 2009년 3월에 그의 팔순 모임을 친지들과 함께 조촐하게 가졌다. 그리고 두 내외분이 상도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지내다 2014년 4월 24일 85세로 소천하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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