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도교회 현대적 교회 신축

황대식 목사는 상도교회에 부임하여 2~3년이 지나자 낡고 좁은 교회당을 새로 건축하기로 하고,  건축위원회를 조직하고 ‘40일 기도’를 선포했다. 그리고 그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 모아두었던 ‘금붙이’ 11점을 ‘40일 기도’ 첫날 새벽기도회에서 건축헌금으로 바쳤다. 이를 계기로 성도들의 금붙이 헌납이 이어졌다, 또 가정마다 헌금함을 나누어주고 한 달에 한 번씩 교회에 봉헌하게 했다. 그 결과 1970년에 착공한 건축이 전교인들의 큰 헌신으로 1972년 헌당할 수 있었다.

당시 상도교회의 건축은 교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예배중심의 과거 교회당 구조를 예배, 교육, 친교, 봉사 등 현대적으로 다양한 목회적 공동체를 접목한 교회당 구조로 바꿨기 때문이다. 당시 상도교회의 건축설계도를 가져다 건축하는 교회가 초교파적으로 상당수 있을 정도로 상도교회 건축은 한국교회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크게 보다 바르게’라는 목회철학의 구현활동
그가 왕성하게 목회 활동하던 1960~1980년대는 모든 교회의 목표가 성장이었다. 교회마다 신자들 끌어 모으기에 혈안이 되어 급격히 성장한 교회도 생겼지만 부작용도 속출해 교회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생겼다. 당시 한국교회의 모습이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한 황 목사는 ‘크게 보다 바르게’라는 목회철학을 수립하고, 다양한 교육을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미국에서 일어난 평신도신학이 한국에 들어오자 한국 교계에서 평신도를 깨우치는 훈련을 김준곤, 옥한흠, 하용조 목사가 시작했다.

우리 교단에서는 황대식 목사가 가장 먼저 시작했다. 그는 교회 안에 ‘평신도대학’이란 명칭으로 2년 과정을 수립하고 구역장 교육을 시작했다. 그 결과 구역장들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변화되어 1년 만에 구역회가 배가되었다. 이후 대상을 모든 직원으로 확대하여 훈련을 시켰더니 모두 몰라보게 달라져 직원들의 가정이 새로워졌고, 직원들이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기 넘치는 교회가 됐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황 목사는 교단의 젊은 목사들의 요청을 받아 각 교회 직원들을 서울 유스호스텔로 불러서 집중훈련을 시켰다. 당시 참여교회가 만리현교회, 은평교회, 천안교회 등 전국에 10여 교회나 됐다. 나중에는 강원도 횡성 산기슭 부지 수천 평을 매입해 안흥제자화연수원을 건립하고 이 곳에서 교역자 및 평신도지도자 훈련에 힘써 교단의 활성화에 공헌했다.

성결복음의 세계화를 위해 총회장 출마
이후 황 목사는 1989년 총회에서 단독 후보로 출마하여 부총회장에 추대되었고, 이듬해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가 총회장이 된 이유는 ‘성결복음의 세계화’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당시 세계가 EC, APEC, ASIAN 등 세계가 협력체를 구축하는 시점이어서 그는 이런 흐름을 교단의 발전에 접목시키는데 노력했다.

그는 중국에 가서 삼자(三自)교회 지도자인 팅 주교를 만나 성결교회 파송 선교사 인정에 대해 긍정적 확답을 받고, 러시아도 가서 정교회의 총대주교를 만나 성결교회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합의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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