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학교 입학과 6.25 고난에서 얻은 사명감

황대식은 1948년에 중학 5년 과정을 마쳤지만 당시 조국이 광복이 되고 남북이 38선으로 분단되었다. 남쪽은 미군이 군정을, 북쪽은 소련이 군정을 하면서 시국이 매우 혼란했다. 해방으로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자들이 귀국하여 저마다 새로운 정부를 구상했기 때문이다.

소위 미국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이승만파, 소련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여운형파, 중도 남북연합을 주장하는 김구 등에 따라 파벌이 형성되어 혼란했다.

황대식은 해방된 조국을 위해 헌신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당시 고향 출신 박헌영이 소련에 가서 공부한 후 공산주의자가 되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의 책임자로 남한에 파견되어 은밀히 고향 동지들을 찾았다. 중학 동창생들 중 박헌영에게 가담한 자들이 황대식에게 연락했지만 그는 신앙이 있었기에 공산주의를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차츰 국가가 안정이 되자 그는 장차 할 일을 위해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 그의 열심 있는 신앙을 본 이용선 목사가 그에게 신학교에 가서 주의 종이 되라고 계속 설득했지만 그는 아직 소명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신학교가 서울에 있다는 것이 좋아 1950년 4월에 서울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성결교회는 예수 재림의 신앙이 일제의 국체에 어긋난다고 해서 1943년 4월 일제 총독부에 의해 서울신학교가 폐교됐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흩어진 교역자들이 다시 모여 1946년 복교된다. 그러다 1950년 북한군의 남침으로 6.25 전쟁이 일어났는데 황대식은 바로 6.25전쟁 일어나기 2개월 전에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사명감 없이 신학수업은 하기가 힘들어 첫 학기부터 몇 번이나 중퇴하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실행을 못하다가 그 해 여름 6.25 전쟁이 일어나 자동 휴교가 되어 귀향했다. 그는 고향 예산은 당시 박헌영 일파 공산분자들이 거칠게 설쳐대는 바람에 숨어서 지내며 고통을 받다가 비로소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는 이런 사실을 “6.25 사변을 겪으면서 내 인생관이 달라졌다”고 서울신대 역사연구소에서 발간한 회고록에서 밝혔다.

그해 9월 하순에 공산군이 퇴각하자 그는 서울신학교가 부산 동래 금정산 기슭에서 피란 신학교로 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근 몇 동료 신학생들과 연락하여 함께 먼 수백리의 길을 도보로 고생하면서 부산으로 내려가 판자촌 신학교에 합류했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으므로 국가적, 국민적으로 생활이 매우 궁핍했다. 더구나 부산은 전국에서 피란 온 백성들로 거리와 마을마다 초만원이었다. 다행히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철수당한 OMS(동양선교회)가 전쟁으로 고난당한 한국인을 돕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해 많은 구호품으로 봉사했다.

그 덕에 신학교가 금정산 기슭에 터를 잡고 대형 천막을 두개 친 후 나무로 긴 책상 겸 식탁을 만들어 신학생들이 공부하며 숙식을 해결했다. 생활환경은 열악했으나 신학생들은 공부가 끝나면 산으로 올라가 자신의 사명감과 함께 국가와 민족을 위해 소리쳐 기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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