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

강신찬 목사는 고교시설,  강릉상업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몇몇 친구들과 장래희망을 토론하던 때 전혀 생각지 못하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난 너희들이 성공하면 너희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말이 씨가 되었는지 그는 1955년 부친의 간곡한 성원을 마다하고 연세대학교 입학을 포기했다. 대신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이 일로 강 목사는 부친에게 외면당해 고아 아닌 고아처럼 되어버렸다.

당시 강 목사는 일반대학보다 신학교에 가면 신앙이 잘 성숙하여 훌륭한 신자가 되리라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신학교 입학면접 때 “왜 신학교에 왔는가?”라는 질문에 그는 소명도 사명도 아닌 “신앙 지키려고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데도 입학이 되어 기숙사생활이 시작되었다.

신학교에는 천사들이 모이는 줄 생각했는데 그 기대치가 사라져 실망했다.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에 그는 큰 실망감이 들었다. 왜 신학대학에 왔는지 조차 흐릿해질 정도로 상처가 컸다. 이후 그의 신학교생활은 학문에 대한 열성과 신앙성숙에 대한 자극이나 기대가 사그라들어 방향을 잃었다.

설교학 시간에 그의 설교를 들은 한 교수의 평가는 “형제는 그것을 설교라고 하는가?”였다. 그가 신학교 4년 생활에서 얻은 것은 폐결핵과 실망감뿐이었다. 그가 신학교를 졸업했을 때 동문은 거의 목회 일선으로 나갔는데 그와 두 친구만 남아 방황하고 있었다.

당시 강신찬 전도사는 철도청에 취직하려고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어느 날 저녁 친구 김무경 전도사와 노량진 거처로 가는 차에 합승했다.

그런데 그들이 탔던 차가 한강 다리에서 추락하여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는 사고가 났다. 요행히도 강 전도사 일행은 사고 직전 한강 입구에서 하차하여 참변을 면했다.

이 충격적인 사건 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재 정립하기 위해 고향 강릉으로 내려갔다. 마침 교역자가 공석인 강릉 성덕교회에서 전도사가 오셨다며 그를 청빙했다. 강 전도사는 한 달 동안 주저하다가 끝내 권유에 못 이겨 부임했다.

친구를 좋아하는 그는 직원회 허락도 없이 폐결핵으로 쓰러진 남봉현 전도사와 더불어 김무경 전도사를 성덕교회로 불러들였다. 일을 저질러 놓고 보니 큰 짐이 되었다. 그렇다고 오라고 한 친구들을 다시 오지 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고민 끝에 그는 직원회를 열어 사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사임서를 냈다. 그러나 직원들은 아무런 원망 불평 없이 오히려 강 전도사를 위로하며 잘했다고 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좋은 친구들이 오셨으니 우리 전도사님 외롭지 않아서 좋고, 오셔서 병 고칠 터이니 좋고, 이 작은 교회가 전도사님 세분을 모시니 영광이 아닙니까? 사례비는 못 드려도 식사는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12명의 직원이 손뼉 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그는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말년에 그때의 사랑에 보답하는 뜻으로 부평제일교회에서 퇴직금으로 받은 2억 원을 성덕교회 새 성전 건축에 헌금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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