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워야 산다’는 뜻을 세운 성장시절

황대식(黃大植)은 1931년 3월 5일 충남 예산군 삽교면 용동리 610번지에서 부친 황갑진과 모친 신소희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6살 때부터 마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후 8살 때 십리되는 보통학교(초등)에 입학, 졸업했다.

계속 배우고 싶었지만 가정이 가난해서 바로 진학하지 못하다가 1년 후 부친을 설득하여 군내에서 유일한 중학과정(5년)인 예산농림학교에 진학했다. 학교는 그의 집에서 8km나 되는 먼 길이었으나 그는 향학열 하나로 날마다 뛰어다니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가 이렇게 배움에 열성인 것은 그의 집 가난을 극복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당시 보통학교는 약간의 월사금을 학교에 냈지만, 고등보통(중)학교는 상당한 액수의 월사금을 내야했기에 가난한 가정의 자녀들은 대개 중학진학을 포기하고 부친의 농사를 거들며 살아갔다.  그는 집이 너무 가난해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한(恨)이 되었다.

당시 조선 사람들에게 유행하는 권학가(勸學歌)라는 노래가 있었다.

“여름날 강가에서 고기 잡는 아이들/ 일할 때 일하고 배울 때 배우세/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간단한 노래지만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배워야 산다’는 뜻을 굳게 세우고 노력한 당찬 소년이었다.

그는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났었다. 그의 할머니가 마을에서 10리 길 되는 역리교회의 초창기 신자여서 그의 가문신앙은 그에게까지 3대째 이어졌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따라 주일이면 10리 길이 넘는 역리교회에 동생들과 함께 다녔다.

역리교회는 1923년 예산군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첫 성결교회였다. 역리교회에 인근 여러 마을의 사람들이 다녀 부흥했으나 1943년 12월 일제에 의해 전국성결교회가 해산될 때 폐쇄되었다가 1945년 광복 후 역리교회 신자들이 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모였다. 그때 신자들은 앞으로 발전을 위해 역리보다 면 소재지인 삽교로 이전하자는 의견이 많았다.

그래서 역리교회 신자들이 1945년 9월 삽교에 조그만 면화 창고를 하나 빌려 수리한 후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면서 이름도 삽교교회라고 했다. 이후 역리에 사는 신자들이 6km를 걸어 삽교교회까지 다녔으며, 이용선 목사와 김만효 전도사를 교역자로 모시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점점 부흥이 되어 갔다.

하지만 몇 년 후 역리에 사는 신자들은 교회가 너무 멀어서 신앙생활하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다. 특히 농번기 때는 삽교까지 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역리의 신자들이 마음을 모아 이전의 역리교회를 역리에 재건한 것이 1948년 10월이었다.

중학생 시절에 해방을 맞은 황대식은 새로 생긴 삽교교회에 열심히 다녔다. 역리의 신자들이 역리교회를 재건하고 돌아갈 때도 그는 돌아가지 않고 삽교교회에서 계속 신앙생활을 했다. 그는 시골모습인 조용한 역리보다 읍처럼 사람들이 많은 삽교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좋았고 배우는 것도 많다고 생각하는 도시체질이었다.

이런 그의 모습이 그가 활동적인 성격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그는 삽교교회에서 중학교 4학년 때 이용선 목사에게 세례를 받아 세례교인이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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